실패한 과학교사와 설명하는 과학교수님
[김우재의 2밀리미터 렌즈]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군체’ 두 생물학자가 비추는 두 사회
- 대중서사의 온도 차 할리우드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가설의 실패와 구조적 소모를 겪는 ‘보통의 과학자’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반면, 한국 영화 「군체」 속 과학자는 단순한 설명 자레이거나 진부한 ‘미친 천재’로 소비된다.
- 부재하는 실패의 내러티브 한국 사회는 실험실의 어두운 단면(인건비 착복, 갑질 등)을 알면서도 이를 깊이 있는 이야기로 확장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과학자는 동경할 수 없는 평면적인 직업으로 남는다.
- 진정한 과학 문화의 조건 노벨상이나 예산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와 좌절을 겪는 과학자의 삶을 매력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토양이며, 그 실패 서사가 일상이 될 때 비로소 사회에 과학이 스며든다.
올해 극장에서 나는 두 명의 생물학자를 만났다. 한 사람은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라일랜드 그레이스, 다른 한 사람은 전지현이 연기한 권세정 교수다. 두 영화 모두 잘 됐다. 3월에 개봉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국내에서만 200만 명을 넘겼고 전 세계에서 5억 달러 넘게 벌었다. 5월에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열흘 남짓 만에 300만 관객을 넘겼다.
흥행 성적표만 보면 두 영화는 비슷한 무게를 가진 상업영화다. 그런데 두 영화가 ‘과학자’라는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놀랄 만큼 다르다. 나는 그 차이가 단순히 각본의 완성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과학자의 얼굴에는, 그 사회가 과학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가 정직하게 새겨진다.
학계에서 쫓겨난 사람이 지구를 구한다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실패한 과학자다. 그는 생명에 반드시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논문을 썼다가 동료 과학자들의 조롱을 받았다. 학계에서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연구를 접고 중학교 과학 교사가 되었다.
이 설정은 SF적 과장이 아니다. 주류가 아닌 가설을 붙들었다는 이유로 자리를 잃고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을, 나는 실제로 여럿 알고 있다.
태양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아스트로파지’라는 미생물이 원인으로 지목되자, 세상은 이 잊힌 사람을 다시 불러낸다. 그가 남몰래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던 문제를 그 혼자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그래서 실험 장면이다. 그는 가설을 세우고, 조건을 바꾸고, 틀리고, 다시 세운다. 관객은 한 사람이 미지의 생물을 상대로 통제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본다. 놀라운 것은 이 지루할 수도 있는 과정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라는 점이다.
이 영화가 진짜로 대단한 지점은 따로 있다. 그레이스는 결국 자신의 그 유명한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를 학계에서 밀어냈던 그 이론,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그 주장이 사실은 옳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자기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과학자에게 패배가 아니라 일과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관객에게 설명 없이 툭 던져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과학을 알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의 중반부를 채우는 것은 외계인 로키와의 공동 연구다. 언어도, 감각기관도, 몸을 이루는 물질조차 다른 두 존재가 숫자와 단위를 맞추는 데서 시작해 함께 실험을 설계하고 결과를 나눈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과학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가장 정확하게 그린 은유라고 생각했다. 국적도, 모국어도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법론 위에서만 겨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일, 그것이 연구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가장 서늘한 대목은 마지막에 온다. 그레이스는 인류를 구하겠다고 손을 든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도망치려 했고, 프로젝트 책임자는 그를 약물로 재워 우주선에 실어 보냈다. 지구는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냥 소모해버렸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에 살려낸 것은 그가 구해낸 지구가 아니라, 그가 도왔던 외계인이었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생태계는 실제로 이렇게 굴러간다. 이름 없는 연구자들의 실패와 소진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성과가 나오면 그 발판은 조용히 잊는다. 헐리우드는 그 구조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영웅담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뼈대로 삼았다. 과학적 개연성을 지키는 세심함과, 과학자가 제도 안에서 겪는 구조적 차별을 응시하는 세심함은 결국 같은 종류의 성숙함이다.

「군체」의 과학자는 왜 계속 설명만 할까
권세정(진지현 분)은 생명공학 교수다. 그는 감염자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고, 무리가 어떻게 정보를 주고 받으며 진화하는지 분석하고, 약점을 찾아낸다. 설정만 놓고 보면 훌륭한 과학자 주인공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가 굳이 과학자여야 했던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극에서 실제로 맡은 기능은 관객에게 설정을 설명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미의 집단지성, 페로몬을 통한 소통, 학습하는 감염자. 이 설명들은 실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냥 그가 이미 알고 있다. 승부를 가르는 향수 작전조차 검증되지 않은 직감에서 튀어나온다. 그 전까지 감염자들이 냄새를 쫓는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작전에 목숨을 건다. 여기서 과학은 서사를 끌고 가는 엔진이 아니라, 서사에 덧입혀진 자막에 가깝다. 과학자를 형사로 바꿔도, 군인으로 바꿔도 이야기는 대체로 굴러간다.
그리고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은 ‘미친 과학자’다. 서영철(구교환 분)은 모두가 완전하게 소통하는 신인류를 만들겠다며 ‘생물테러’를 저지른다. 이것은 프랑켄슈타인 이래 200년 된 문법이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과대망상에 빠진 천재가 인류를 실험대에 올린다는 이야기. 익숙하고, 편하고, 유치하다.
‘미친 과학자’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을 몰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고,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논증할 필요도 없다. ‘광기’ 하나로 모든 개연성의 구멍이 메워진다. 그래서 과학을 잘 모르는 사회일수록 이 캐릭터를 자주 쓴다.
다만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그 분노의 뿌리다. 서영철의 아버지는 연구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연구원 명단에 올려 인건비를 부풀린 교수였다. 그 사실을 고발한 사람이 젊은 연구원 시절의 권세정이었다. 아버지는 조사를 받고 해임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은 그 죽음의 책임을 고발자에게 물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깐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국 관객의 머릿속에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어떤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는지가 여기서 정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건비 착복, 대학원생 갑질, 성희롱과 폭언, 데이터 조작. 한국의 대중서사에서 실험실이 등장할 때 따라붙는 단어들은 대체로 이 목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 인식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이 목록의 항목들을 뉴스가 아니라 주변에서 들으며 지난 20년을 보냈다.
문제는 영화가 이 날카로운 관찰을 과학의 이야기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내부고발을 한 사람이 그 뒤에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왜 한국의 실험실에서는 그런 일이 반복되는지, 연구비라는 돈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빌런의 동기를 설명하는 배경 설정으로 한 번 소비되고 끝난다. 한국 영화는 실험실의 어두운 면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본 경험은 아직 없는 셈이다.

실패를 그릴 수 있는 사회
두 영화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과학자는 실패하는 사람이고, 「군체」의 과학자는 설명하는 사람이거나 미친 사람이다.
실패를 그리려면 과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설이 무너지는 장면이 관객에게 지루하지 않으려면, 관객 쪽에서도 과학을 이미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 영어권 관객은 실험이 실패하는 장면을 견딜 줄 안다. 그것이 이야기의 일부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감각은 수십 년 동안 쌓인 과학 저술과 다큐멘터리와 소설이 만들어 놓은 지층 위에 서 있다.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이 그 지층 위에서 태어났고, 영화는 그 지층을 믿고 실험 장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올렸다.
한국에서 과학자가 선호되는 직업이 아닌 이유를 사람들은 대개 돈과 안정성으로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처우는 실제로 나쁘고, 자리는 실제로 적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앞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이야기로 먼저 만난다. 의사와 검사와 재벌 2세는 수백 편의 드라마에서 매력적이고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간으로 그려진다. 과학자는 설명하는 사람이거나 미친 사람으로 그려진다. 어느 쪽도 되고 싶은 얼굴이 아니다.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이 전부 의대로 향한다는 기사가 해마다 반복된다. 그때마다 대책으로 나오는 것은 장학금과 병역특례와 정착지원금이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돈으로 사람을 데려올 수는 있어도, 돈으로 동경을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직업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삶이 이야기가 될 만하다고 사회가 인정할 때다. 우리는 아직 과학자의 하루를 이야기로 만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과학이 한 사회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노벨상 수상자의 수나 연구개발 예산의 규모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 사회가 과학자의 실패를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가로 측정된다.
성공한 과학자의 위인전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 밀려난 사람, 자기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 시스템에 쓰이고 버려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은 과학을 문화로 가진 사회만 할 수 있다.
언젠가 한국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고 싶다. 밤새 돌린 실험 결과가 자기 가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웃으면서 다시 실험 노트를 펴는 과학자.
좀비도 없고 폭발도 없고 미친 천재도 없는, 그냥 보통 과학자. 그 장면이 관객에게 지루하지 않은 날, 우리는 비로소 과학을 가진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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