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권력의 ‘성채’를 허물어라
[김우재의 2밀리미터 렌즈]
- 중국의 ‘학벌(학문 카르텔)’ 타파 시도 시진핑 주석의 지적과 학생들의 연이은 고발을 통해, 중국 학계 내 폐쇄적 이익집단과 연구 부패를 청산하려는 개혁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 글로벌 과학계의 구조적 왜곡과 마태 효과 과도한 경쟁과 지표 숭배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과학계에 소수에게 자원이 편중되는 ‘마태 효과’와 카르텔 문제를 공통으로 낳고 있다.
- 올바른 진단과 정책적 접근의 필요성 학계 생태계 정화를 위해서는 지도자의 올바른 의지가 중요하지만, 한국의 과거 사례처럼 ‘카르텔’이라는 명분이 기초연구와 청년 연구자를 해치는 엉뚱한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9월 15일, 중국공산당의 이론지 《구시(求是)》가 시진핑 국가주석의 연설 전문 한 편을 실었다. 올해 노동절 직전인 4월 30일 상하이에서 열린 ‘기초연구 강화 좌담회’에서 한 발언이다. 나는 이 연설에서 한 단어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학벌(学阀).
시진핑 주석은 “연구 생태계를 정화해야 한다”면서 “연구진실성을 강화하고 과학기술계의 학풍을 바로잡으며, ‘파벌 문화(圈子文化)’와 ‘학벌’ 행태를 타파하고, 논문만을 중시하고 최상위 학술지만을 중시하고 각종 칭호(帽子)만을 중시하고 수상실적만을 중시하는 경향을 실질적으로 바로잡으며, 연구 부패를 단호히 처벌하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이를 두고 시진핑이 처음으로 ‘학벌’ 타파를 언급했다고 짚었다.
나는 하얼빈에서 초파리를 연구한다. 또한 나는 지금 중국 대학의 한복판에서 칭호와 최상위 학술지 숭배가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지를 가까이서 목도하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은 이제 세계 1위임에 틀림없지만, 과도한 경쟁은 과학기술자들의 일상을 숨가쁘게 조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최고지도자가 그 병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묘한 감정을 남긴다.
학벌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학벌(学阀)’이라는 한자어가 우리말의 ‘학벌(學閥)’과 똑같은 글자이면서도 뉘앙스가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학벌은 출신 대학의 서열을 뜻한다. 중국에서 学阀은 같은 학교 동문과 학술 네트워크가 지위와 명성과 행정권력을 무기로 학술자원을 독점하고, 폐쇄적 이익집단을 만들어 과제 심사와 연구비 배분과 인재 승진에서 절대적 발언권을 휘두르는 현상을 가리킨다.
기업의 시장 독점이 혁신을 훼손하듯, 학문 권력의 독점은 공정성과 혁신을 훼손하고 부패와 인재 유출을 부른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학문 권력 카르텔’에 가깝다.
이 말의 뿌리는 놀랍도록 오래됐다. 마오쩌둥은 1921년 8월 「후난 자수대학 창립선언」에서 당시의 서원과 관학을 비판하며, 학술이 소수의 ‘학벌’에 독점되어 평민사회와 갈수록 멀어지고, 결국 “지식계급이 평민계급을 노예처럼 부리는 기괴한 광경”을 낳았다고 썼다.
한 세기가 지나 문맹과 지식인을 가르던 분수령은 사라졌지만, 학벌은 학계 내부에 즐비하게 늘어선 산봉우리 같은 성채로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시진핑 정권은 이 문제를 여러 번 건드렸다. 그만큼 중국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잡은 관행이라는 뜻이다. 2018년 9월 전국교육대회에서 그는 점수·진학·학력·논문·인재칭호만 중시하는 ‘오유(五唯)’의 타파를 요구했다. 이듬해 6월 중공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은 처음으로 ‘학벌’을 명시한 문건을 냈다.
연공서열과 혈연·연고의 고리를 끊고, 학파적 편견과 학벌식 행태에 반대하며, 행정직이나 학문적 지위로 다른 견해를 억누르지 말고, 실질 기여 없는 ‘이름 올리기(挂名)’를 반대하라는 내용이었다. 2020년 2월에는 교육부와 과기부가 「고등학교 SCI 논문 관련 지표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의견」을 통해 ‘SCI 지상주의(唯SCI)’ 타파를 명령했다.
그러나 문건이 풍조를 이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심해졌다. 2026년, 베이항대 박사과정을 중퇴한 서른세 살의 과학 블로거 겅훙웨이(耿洪伟)-’겅퉁쉐(耿同学)’라는 이름으로 알려진-가 4월부터 빌리빌리와 더우인에서 985 명문대 생명과학 분야 ‘칭호 학자’들의 논문 이미지 중복과 데이터 이상을 실명으로 고발하기 시작했다.
퉁지대, 중산대, 난카이대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창장학자이자 제칭(杰青) 출신인 퉁지대 생명과학원 원장 왕핑(王平)이 해임됐다. 그전 해에는 충칭대 학부생 류페이차오(刘培乔)가 SCI 논문 14편을 발표했는데 제1저자는 하나도 없고 공저자에 대학원 부원장인 아버지 류쭤화(刘作华)의 이름이 올라 있어, “천재 학생은 없고 학장 아버지만 있다”는 조롱 속에 아버지가 해임되는 일이 있었다.
여론은 개별 논문의 오류에서 최상위 학술지 보상, 칭호 학자의 자원 독점, 동료평가의 상호 보호, 청년 학자의 출구 없음이라는 구조의 문제로 옮겨갔다. 베이징대의 라오이(饶毅)는 5월 강연에서 중국이 연구부정에서 세계사적 기록을 세우고 있다며 엄벌을 촉구했다.
이미 그전부터 반부패의 칼끝은 학계를 향하고 있었다. 후난성 창사의 중난대학에서는 전 총장이자 공정원 원사인 장야오쉐(张尧学)가 2025년 10월 낙마했고, 전 부총장 궈쉐이(郭学益)가 12월 조사를 받았다. 학술 칭호 수여와 표창을 둘러싼 금품수수가 통보에 담겼다.
형양의 난화대학에서는 7월 한 달 사이에 전·현직 총장이 잇따라 조사를 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중난대 샹야의학원 유전학 계통 출신이었다. 홍콩 《명보》는 9월 16일, 앞으로 상당수 학계 거물이 조사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아래로부터의 고발과 위로부터의 의지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병이 아니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것은 결코 중국만의 병이 아니다. 과도한 경쟁이 평가를 왜곡하고, 왜곡된 평가가 자원 독점을 낳고, 자원 독점이 카르텔을 만든다. 이 연쇄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과학자로 일했던 모든 국가와 연구기관은, 어느 정도 언제나 비슷한 평가체제의 왜곡을 경험하고 있었다.
2014년, 브루스 앨버츠·마크 커슈너·셜리 틸먼·해럴드 바머스라는 미국 생명과학계의 원로들이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미국 생의학 연구를 그 구조적 결함에서 구하라’는 글을 실었다.
끝없는 성장을 전제한 시스템이 과잉경쟁을 낳아, 가장 뛰어난 젊은이조차 이 직업을 떠나게 만들고 노련한 연구자마저 최선을 다하기 어렵게 한다는 진단이었다. 그들은 이 과잉경쟁이 미국 NIH의 연구비 성공률을 한때 30%대에서 ‘십대 초반(low teens)’ 퍼센트로 끌어내렸다고 적었다.
박사가 첫 독립 연구비(R01)를 받는 나이의 중앙값은 1980년 35.7세에서 계속 밀려나, NIH의 2026년 8월 집계로도 여전히 마흔둘 언저리에 멈춰 서 있다. 소수의 엘리트에게 자원이 쏠리는 ‘마태 효과’(마태복음 25장 29절의 구절에서 유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편집자주)는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1968년 《사이언스》에 「과학에서의 마태 효과」로 이름 붙인 현상이다.
유럽은 이 왜곡을 제도로 고치려 애써왔다. 2013년의 샌프란시스코 연구평가 선언(DORA)과 2022년의 연구평가개혁연합(CoARA)은, 임팩트팩터라는 저널 지표를 ‘개인 연구자의 질을 재는 잣대로 쓰지 말자’는 반성에서 나왔다. 그런 선언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표가 이미 과학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탈리아에는 ‘바로니(baroni)’, 곧 학계의 남작들이 있다. 채용 심사(concorsi)를 쥐고 자기 자식과 제자를 앉히는 세습의 관행은 오래도록 스캔들이었고, 반마피아 검사 출신인 반부패청장이 “남작들을 과거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벼를 만큼 뿌리가 깊었다.
지표가 목표가 되면 지표이기를 멈춘다. 굿하트의 법칙이다. 문제는 이 왜곡을 과학자 사회의 자정에만 맡길 수 없다는 데 있다.
카르텔의 수혜자가 곧 평가자이고, 그 평가자가 다시 정책 자문가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손이 스스로 그 손을 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나는 이전 글에서 2025년의 스톡홀름 연구평가 선언을 다루며 이렇게 썼다. “이 모델은 개념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폭발적이다. 대학과 출판사와 순위 산정 기관 모두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대서양 건너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한 해에만 NIH와 NSF의 연구비 수천 건-미반환 미집행액만 십억 달러 단위에 이르는-을 동결하거나 삭감했다. 지도자의 인식이 과학 생태계를 어느 방향으로든 단숨에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반증이다.
지도자의 인식과 의지가 필수다
시진핑 연설의 특징은 두 가지를 한 묶음으로 말했다는 데 있다. 하나는 투자의 확대다. 그는 중국의 기초연구비가 전체 R&D의 7%를 넘지만 과학기술 강국의 15~20%에 비하면 격차가 크다며, 비중을 점진적으로 높이고 재정투입을 안정적으로 늘리라고 했다. “기초연구는 전체 과학체계의 원천이자 모든 기술문제의 총괄 핵심”이며 “세계 과학기술 강국이 되려면 기초연구를 반드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가 바로 생태계의 정화다. 돈을 더 붓기 전에 돈이 흐르는 관부터 청소하겠다는 인식. 이 순서가 중요하다.
물론 나는 위로부터의 캠페인이 지닌 한계와 위험을 냉정하게 본다. 2019년에 이미 ‘학벌’을 명시한 문건이 나왔는데도 풍조가 도리어 악화됐다는 사실은, 문서 한 장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반부패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정의의 도구일 수도, 정치적 숙청의 도구일 수도 있다. 학벌 청산이라는 명분이 특정 계파를 겨냥한 표적 수사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최고지도자가 문제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에는 힘이 있다. 이름이 붙어야 비로소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 다른 인식
한국의 역사에도 지도자의 의지로 과학이 일어선 장면이 있다. 1966년 KIST가 문을 열 때, 초대 소장 최형섭은 개발도상국에서는 과학기술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므로 정치지도자의 관심과 의지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대통령보다 봉급이 많은 과학자들을 모셔왔고, 1967년 과학기술처가 섰으며, 1971년에는 스탠퍼드대 부총장 출신 프레더릭 터먼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KAIS가 태어났다. 그 의지가 과학을 오롯이 문화로 대접했느냐는 다른 논쟁이지만-나는 오히려 그 시절 과학이 경제의 도구로 동원되었다고 써왔다-지도자의 인식이 과학의 운명을 갈랐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나는 오래전 한 글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착한 나라에서 국가지도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과 비전은 절대적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 단어를 떠올린다. 카르텔. 2023년 한국에서도 ‘카르텔’이라는 말이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말은 구조에 대한 진단 없이 예산 삭감의 명분으로 쓰였다. 그해 R&D 예산은 통계가 작성된 1964년 이래 처음으로, 전년보다 14.7%나 깎였고, 정작 그 칼에 베인 것은 카르텔의 정점이 아니라 청년 연구자와 기초연구였다.
나는 그 시절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부실한 숫자로 자화자찬하다가 결국 “카르텔과 마피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윤석열에 의해 도륙당했”다고 썼다. 같은 단어가, 한쪽에서는 관을 청소하기 위한 진단으로, 다른 쪽에서는 관을 잠그기 위한 구실로 쓰였다. 이후 정부가 바뀌며 예산은 복원되고 기록적 규모로 다시 늘었지만, 한번 베인 씨앗의 상처는 그렇게 빨리 아물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한국을 길게 탓할 생각이 없다. 다만 독자가 스스로 두 장면을 겹쳐보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의 이름을 부르는 일과, 그 이름을 빌려 엉뚱한 곳을 베는 일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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