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언급 ‘독일 통일’....진짜 교훈 꼽으라면

[고수석의 통일 수첩]

지난 2020년 10월3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독일 통일 30주년 기념식 행사장의 통일 기념 조형물.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20년 10월3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독일 통일 30주년 기념식 행사장의 통일 기념 조형물.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고수석 북한학 박사] 독일 통일은 한국에게 부러운 대상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통일은 전쟁을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역사만 보더라도 삼국통일, 후삼국통일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독일 통일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 한국이 지향하는 평화통일의 방향이다. 하지만 북한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독일 통일과정을 연구했다. 부럽기만 하다.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리처럼 전쟁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정권이 바뀌어도 전 정권의 통일정책을 계승한 것도 부럽다. 학자들마다 다르겠지만 독일 통일과정에서 배울 점을 한 가지 꼽으라면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 서독 총리의 서방정책이다.

독일 통일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빌리 브란트(1913~1992) 서독 총리다. 동방정책으로 모스크바 조약 체결(1970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1972년) 등 독일 통일의 가속페달을 밟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를 꼽는 것은 그의 서방정책이 동방정책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만약 동방정책을 먼저 추진했더라면 독일 통일은 더 시간이 지체했을 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독이 서둘러 동방정책을 추진했으면 주변 강대국이 결사 반대했을 것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처럼 패전 서독은 서방국가들의 신뢰가 먼저 필요했다. 더 이상 ‘유럽의 악동’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데나워는 견원지간이었던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불신을 해소하는데 주력했다.

구체적으로 서독은 유럽의 여러 다자기구에 들어가 스스로 구속을 받았고 프랑스와의 관계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인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기계적 상호주의를 버리고 양보할 것은 과감하게 양보했다. 그 예로 자를란트 문제를 들 수 있다. 자를란트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번갈아 차지했던 지역이다.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이 통독의 토대 김대중, 한미일 공조 후 남북정상회담 남북관계 개선도 한미일 공조가 우선

제2차 세계대전에서 거의 무임승차로 독일의 분할점령에 참가한 프랑스는 1946년 12월 이 지역을 프랑스 경제권에 편입시키고 자를란트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해 독일에서 분리독립시킬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는 자를란트를 1949년에 설립한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의 가입을 성원하면서 서독의 가입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하여 서독은 1950년 7월 체면을 무릅쓰고 일개 주에 불과한 자를란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유럽평의회에 참가했다. 이는 독일인에게는 큰 굴욕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쓴 약을 달게 마셨다. (김영희, 『베를린장벽의 서사』)

이런 과정을 거쳐 서독은 1963년 프랑스와 ‘엘리제조약’으로 불리는 독일-프랑스의 화해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아데나워의 독일 통일 과정에서 가장 큰 업적이다. 만약 엘리제 조약이 없었다면 빌리 브란트 정권의 동방정책도 서쪽에 발목이 잡혀 그런 빛나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한반도에 활용한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햇볕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 보다 먼저 4대 강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는 1998년 6월에 미국, 10월에 일본, 11월에 중국, 1999년 5월에 러시아를 방문했다.

특히 일본이 하이라이트였다. 당시 한일 관계는 악화된 상황이었다. 1996년 하시모토 일본 총리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오면서 한일 관계는 최악을 치달았다. 방일 당시 논란은 김 대통령이 일본 천황을 ‘천황’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한국 언론은 일본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영국은 여왕이라고 하니까 여왕으로, 스페인은 황제라고 하니까 황제라 불러주고,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니까 대통령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러 준 것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 열린 정신들이 한류로도 연결되는 것 아닐까도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월간중앙, 2006년 1월호)

김 대통령은 감정과 이념을 강조하지 않고 원칙 있는 실용 외교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①양국 간 대화 채널의 확충 ②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협력 ③경제 분야의 협력 관계 강화 ④범세계적 문제에 관한 협력 강화 ⑤국민 교류 및 문화 교류의 증진 등이다. 과거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화해, 관용, 통합으로 한일 관계를 새로 썼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실천으로 한국 내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은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해 한일 간 사회문화 교류를 확대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무역 중심의 경제적 교류를 넘어 양국 시민사회 사이의 교류 협력도 넓혔다.

김 대통령은 당시 불편했던 한일 관계를 회복하고 한미일 3국의 대북공조체제를 마련했다. 그런 다음에 남북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지속적인 남북관계를 위해서는 한미일 공조가 우선이다. 독일 통일 과정과 김 대통령에서 보여주었듯이 서방정책이 선행돼야 한다. 서부전선에 이상이 생겨 발목이 잡히면 동방정책을 지속하기 어렵듯이 한미일 공조가 든든해야 북방정책도 좋은 결실을 맺는다.

김 대통령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이렇게 말을 던졌다.

“통일 이후에도 미군은 한반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세력균형이 이뤄야 한다.”

반발할 줄 알았는데 이에 김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일 미군이 북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통일되더라도 (미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엔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다. 그런데서 세력균형 잡기 위해선 미국이 있어야 한다.” (김대중 전집)

글쓴이

고수석 북한학 박사

고수석 박사는 중앙일보 기자로 20여년 동안 통일이 한국의 성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일․북한 분야를 취재했으며 고려대에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중앙일보에 ‘고수석의 대동강 생생 토크’, 중앙SUNDAY에 ‘평양탐구생활’을 기획연재했다. 저서로는『북한을 움직인 30인』, 『김정일과 IT혁명』등이 있다. 지금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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