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해서라면...끝내 돌아가지 못한 그 곳

[홍예진의 애플파이2] 미국 입양에서 아프간 파병까지...그 후

폭파된 차량 주변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미군들. 사진= AFP/연합뉴스
폭파된 차량 주변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미군들. 사진= AFP/연합뉴스

[홍예진 소설가] 낸시의 그 해 여름 휴가지는 뉴햄프셔의 아름다운 호숫가였다. 조부모를 중심으로 자손들이 전부 모인 대대적인 가족 행사 차원의 휴가라고 했다. 낸시의 남편은 그 집안의 일곱 형제자매들 중 셋째인데, 휴가에서 돌아와 도서관의 서가 앞에서 우연히 나와 마주친 낸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격이 예민한 시어머니가 하도 피곤하게 굴어서 누구도 즐겁지 않은 휴가였다고 했다.

그는 왜 의사가 아닐까

낸시의 시부모님이 친자식 셋 외에도 아이 넷을 더 입양해 키워낸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좀 의아했다. 좋은 분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낸시가 분이 덜 풀린 어조로 목소리를 깔았다.
“그럼 뭐해! 그 성격에 감당이 안 되니까 입양한 자식들한테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는데.”

여자들끼리 시어머니 흉보는 건 어떤 문화권에서나 흔한 일이지만 이건 좀 다른 차원의 치부라서 나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그럴 걸 입양을 왜 하신 거래?”

낸시는 입술 끝을 비틀더니 혀를 찼다.
“물론 시작이야 좋은 의도였겠지만 막상 해보니까 감당이 안 되었던 게지. 자기 성격파악도 못하고 벌인 일이니 오죽했겠어!”

낸시의 남편에게 한국에서 입양된 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건 낸시 부부와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우리 부부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친밀감 자아낼 화제로 대화를 끌어가려고 일부러 그 동생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이상했던 건, 이후엔 그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가만 보면 생물학적 관계인 형네 가족, 누나네 가족과만 주로 왕래하며 지내는 것 같아서 물어보기도 주저됐고, 그러자니 어쩐지 마음이 쓰여 그 동생과도 만나 어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나 내심 기대했다.

그래서 그 집안의 일곱 형제자매가 자녀들을 데리고 부모님과 다 함께 모여 휴가를 보냈다는 말에 반갑고 안심이 됐었다. 혹시 그 동생이 집안에서 차별받고 있는 건 아닌지, 나처럼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유대감으로 그를 염려하는 오지랖이 발동한 것이다.

그 집안의 친자식 셋은 전부 의사인데 반해 입양한 동생들은 다른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도 입양된 자식들이 집안 내에서 겉도는 증거인 것만 같아서 더 그랬다. 한국 출신 시동생은 군인이었다. 언젠가 낸시에게 그 시동생 근황을 슬쩍 물어보니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가있다고 말해주었다.

아프간 철수에 양분된 여론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걸 보며 다양한 시점과 분석이 횡행한다. 광폭했던 과거 행적의 그림자를 달고 결국 집권 세력이 된 탈레반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무력감, 카불 거리의 푸석거리는 석회 먼지처럼 뿌옇고 불투명한 아프가니스탄의 미래, 그 땅의 싸움판에 뛰어들었던 서방 세계 책임론, 종전 결정을 했던 공화당과 군 철수를 실제 진행한 민주당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국 정가의 공방까지, 모두 비루하고 암울한 냄새를 풍기는 이야기들뿐이다. 다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머무는 문장은 유사할 것이다. 자본과 시간을 쏟아 부어도 끝내 상실만을 남기는 일들이 있다는 것.

미국이 20년 동안이나 군력을 소비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지속하는 건 이미 발생한 매몰 비용(sunk cost: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에 의해 부상한 경제 용어)에 붙들려 효용 없는 일을 지속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갇히는 것이다. 미국의 애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며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에는 가족의 일원 중에 직업 군인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가진 지구촌 큰형님의 위세만큼 인력도 비례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인력이 실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사례도 잦다. 미국에서 군인이 된다는 것은 참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으므로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인 것이다. 때문에 미국인들의 실생활을 지켜보면 군인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존중이 국민 정서에 짙게 깔려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내 큰아이의 고등학교 졸업 때만 봐도 사관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과 직업군인으로 자원한 학생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박수를 받게 하는 시간이 행사 절차에 따로 있었다. 내 아이가 한 때 설레어했던 여학생도, 내 아이의 유치원 시절 사진 속에서 젖살 통통한 얼굴로 함께 웃고 있는 남학생도 사관학교에 지원하고 합격해 떠났다.

바다가 가까운 우리 동네는 근처에 해군 부대도 있고, 해안경비학교도 있어서 어디를 가든 제복 입은 군인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며칠 전에는 ‘젊다 못해 어린’ 여군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걸 봤는데 여러 차례 눈이 갔다. 군복 위로 솟은 얼굴들이 어찌나 여릿하고 귀여운지, 그렇게 앳된 얼굴을 한 이들도 격전지로 파병을 갈까 의구심이 일었던 것이다. 군복보다는 팔랑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까르르 웃으며 놀러 다니는 게 어울릴 얼굴들이었다.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에 그들이 가있는 모습을 상상해봤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널 위해서’ 라고 말한 이 있을까

낸시의 시동생 이야기를 끝까지 해야겠다. 어느 날 낸시에게,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그 시동생 말이야, 라고 화두를 연 적이 있었다. 낸시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과 긴장감이 서렸다. 표정을 가다듬은 낸시가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러자 이번엔 내 얼굴이 굳었다.

낸시의 시동생은 아프간 군벌 무장 세력이 설치한 폭발물에 의해 현장에서 즉사해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훈풍이 지나가는 공원에서 낸시가 알려준 그의 죽음은 마치 일부러 슬프게 짜인 각본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 말은 농담일 수 없었고, 그걸 인식한 순간 내 마음에 떨어져 내린 돌덩이의 타격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인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 Kite runner>의 엔딩에는 주인공 아미르가 카불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구해내온 아이 소랍에게 연 날리기를 가르쳐주며 말한다.
“널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어린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던 하산이 아미르를 위해 수차례 연을 잡아오며 하던 말이었다. 하산을 배반한 아미르는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로 가기 위해 하산의 아들을 구출해 미국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하크네스 공원의 나부끼는 연. 사진= 홍예진
하크네스 공원의 나부끼는 연. 사진= 홍예진

내가 즐겨 찾는 이곳 하크네스 해변 공원에도 바람이 좋은 날이면 연을 띄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얼레를 감거나 푸는 이가 꼬마와 아빠 한 쌍일 때도 있고, 제법 자란 아이 혼자일 때도 있다. 꼬마도 아이도 능숙하게 연을 날릴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가 수도 없이 연을 잡아다주었을 것이다.

낸시의 시동생에게도 몇 번이고 연을 잡아다주며 ‘너를 위해서라면’이라고 말해준 이가 있었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는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졌다. 그를 낳은 한국도, 그를 키운 미국도 아닌 곳에서 산산조각이 되어.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으로 기입했습니다.)

글쓴이

홍예진 소설가

홍예진 소설가 겸 에세이스트. 미국 코네티컷의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으며 작품 발표를 시작했다. 산문집 <매우 탁월한 취향>과 장편소설 <소나무극장> 을 썼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