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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진의 애플파이] 주연 배우가 된 시각장애인 이야기

팟캐스트 'Smartless' 커버 이미지.
팟캐스트 'Smartless' 커버 이미지.

여자인 내가, 입담 좋고 매력적인 남자들이 뭉쳐 떠드는 곳에다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거다. 게다가 그들이 딱 호감 갈 농도만큼의 아둔한 면모까지 적절히 흘리면 싫증을 내기도 쉽지 않다. 비록 그것이 전략적인 바보짓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팟캐스트 Smartless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나라는 고정 청취자를 매료해 틀어쥐고 있는 방송이다.

이 팟캐스트의 진행자 셋은 모두 배우이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얼마만큼의 입지를 이뤘지만 하나 같이 학교를 중도 이탈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종영된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오자크’의 주연 배우이자 감독인 제이슨 배이트맨은 고등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이고, 션 해이스와 윌 아네트는 다니던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때려치워서 졸업장을 얻지 못했다. 졸업 실패 소재를 가지고도 방송 중 자조 개그를 일삼는 인물들인데, 친한 연기자들끼리 심심해서 시작해봤다는 팟캐스트 방송 이름이 Smartless인 건 또 얼마나 귀여운 배짱인가.

주 1회 간격으로 업로드되는 이 방송의 설계는 각 진행자가 돌아가면서 게스트를 섭외해오는 것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두 진행자는 녹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당일의 게스트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게스트는 보통 당시의 화제 인물이거나 진즉에 유명해진 사람들이기는 한데,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느슨하고 격의 없는 분위기에 합류해 사사로운 일상의 면모를 드러내는 점이 이 방송의 매력이다. ‘집순이’ 체질이라 셀럽 생활에 적합한 유형은 아닌 것 같다고 스스로를 진단하는 기네스 팰트로의 담백한 고백이나, 아버지가 무서워 억지로 골프를 했던 성장기를 회고하며 미국 골프장의 아시아계 부모들 모습을 희화하는 데이비드 장 셰프의 재치 같은 것들이 술술 흘러나올 수 있게 진행자들이 멍석을 잘 깔아준다.

즐겨듣는 방송이라도 모든 회차를 다 따라잡을 순 없어서 업로드된 리스트 중 내게 흥미로운 인물이 나온 것 위주로 골라 듣는데, 얼마 전에 무심코 아무 회차나 열었다가 내 귀의 주파수를 예리하게 세우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감독 ‘숀 레비’가 나와서,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All the light we cannot see>을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 소설은 미국 작가 앤소니 도어의 작품으로, 첫 페이지부터 나를 사로잡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시종일관 집중력을 풀지 못하게 한 책이다. 숀 레비는 영화 <박물관에서의 하룻밤>과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들>의 제작에 참여한 감독 임에도 나는 그를 알지 못했었는데, 소설 제목이 언급되는 순간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프랑스의 해변 마을 생말로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한국어판 표지(민음사)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한국어판 표지(민음사)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시대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귀중한 보물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파리를 떠나 생말로에 은신하는 시각장애인 소녀와 독일 탄광촌의 고아원에서 히틀러 치하 장교에게 발견되는 천재 소년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줄거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라 어떤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을지 호기심이 일던 중 숀 레비가 인상 깊은 이야기를 했다. 주인공 마리 로르의 역할로 기용된 배우가 실제로도 시각장애인이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는 거였다.

팟캐스트의 진행자들이야말로 다 배우라서 그들로서는 더욱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촬영장의 흐름이 말 외에도, 분위기, 표정, 몸짓, 육안으로 들어오는 스태프들의 기분 같은 것이 합을 이루어 돌아간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진행자 세 사람이 앞다투어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말만으로 디렉팅을 하는지, 앞을 못 보는 배우가 대체 어떻게 동선과 방향을 잡고 움직이는지, 어떻게 미세한 지시를 이해하며, 어떻게 카메라 앵글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연기를 하는지 의문이 줄을 이었다.

산발적으로 쪼개져 흘러나온 질문과 답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감독은 시각장애인 배우와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연출 방식이 얼마나 제스처와 표정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 배우는 스태프들이 바닥에 일일이 작업해 표시한 요철을 발로 더듬어가며 움직여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마리 로르 역할로 시각장애인을 캐스팅하기로 한 제작진은 아예 처음부터 조건이 되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오디션을 진행해 현재의 배우를 찾아냈다는 것. 앞이 보이지 않는 배우에게 연기를 하게 하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돌발할 수밖에 없는데, 모두가 방법을 배워나가며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리 로르 역의 시각장애인 배우 Aria Mia Loberti. 출처= The Gardian
마리 로르 역의 시각장애인 배우 Aria Mia Loberti. 출처= The Gardian

마침 한국에서는 자폐증이 있는 변호사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따뜻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이전에는 다운증후군이 있는 캐리커처 작가를 캐스팅한 드라마가 방영되어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의 어려운 사정을 돌아보도록 공명을 자아낸 바가 있었다. 나는 그저 일상을 살기에 급급한 보통 사람이기에 세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친 게 없다. 비범한 타인들이 세상을 진보시킬 때마다 공감하는 염치 정도나 있을 뿐. 그리고 문득 오래전의 기억 같은 걸 끄집어내 곱씹어보는 것이다.

H는 성격이 유순하고 착했다. 그 동네로 이사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친구가 별로 없었던 나는 놀이터에서 만나 알게 된 H의 선한 성품 덕에 전학생의 고립감 같은 것을 위안받고 있었다. H와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어디선가 H의 동생이 나타나 우리를 따라다니며 말을 걸었다. 우리와는 성별이 다른 남자아이이기도 했고, 생김새나 태도가 생소해서 내가 좀 낯설어했었을까. 그리고 H는 그걸 감지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착했어도 새로 사귄 친구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H는 동생이 나타나면 설득해 집으로 되돌려보내느라 애를 썼다.

어느 날 H가 중대한 비밀을 고백하듯 내게 말했다. 실은 그 동생이 원래는 오빠인데 가족의 합의로 동생의 지위가 되었다고. H가 이유까지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가 H의 오빠인 것보다 동생인 게 더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다운증후군 소유자의 특징인 작은 체격과 어리숙한 행동거지 등으로 그의 서열이 H보다 아래가 되는 게 적합하다고 암묵적으로 당연시한 것이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H의 오빠에게 못되게 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같이 놀아주지도 않았다. H의 부모님이 아이들 놀이 세계의 현장을 모르지 않았을텐데도 아들을 외부에 자연스럽게 노출하며 키웠던 걸 보면 당시로서는 깨인 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의 서열은 뒤바꾸어 놓았던 걸 보면 장애아를 키우면서 부딪쳤던 인식의 장벽에 타협점이 필요했었던 걸까.

인간은 생소한 대상을 접하면 부자연스럽게 느끼곤 한다. 오래전 놀이터의 아이들이 그랬듯이. 그것은 문명을 갖기 이전의 인간, 눈에 설은 모습의 존재를 경계하는 동물적 야성으로 살았던 시절의 유산이다. 진화와 문명과 교육을 통해, 인간은 생김새가 다른 존재라고 해서 적대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배워가며 함께 일하는 방법도 익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양성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영상물 속에서 멋진 연기를 펼쳐 보이는 이들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그 세계로 가는 길과 거기서 낼 수 있는 빛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존재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조차 본인이 설 자리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영상물이 되어 세상에 선을 보이고 난 후에는 어떨까. 마리 로르의 현신이 소설 속에서 걸어 나와 입체적으로 움직이고 말하는 것을 두 눈으로 두 귀로 보고 듣고 난 후에는. 그러면 비로소, 우리가 여태껏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모든 빛들도 하나씩 하나씩 반짝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글쓴이

홍예진 소설가

홍예진 소설가 겸 에세이스트. 미국 코네티컷의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으며 작품 발표를 시작했다. 산문집 <매우 탁월한 취향>과 장편소설 <소나무극장> 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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