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앨빈 토플러, 그리고 전쟁
[홍예진의 애플파이 9] 어째서 김혜수가 앨빈 토플러를 우크라이나 전쟁 어떻게 봐야할까
최근 배우 김혜수가 법조인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다가 서글서글한 눈망울의 그녀가 이제 오십 대의 중년 배우라는 걸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 김혜수가 고교생 스타였던 시절에 나는 <여학생>이니 <하이틴>이니 하는 소녀용 잡지류를 열심히 사서 보던 중학생이었다. 김혜수를 비롯한 또래 스타들이 계절 특집 화보에 자주 등장하던 때였고, 십 대의 김혜수는 어떤 컷에서든 압도적이어서 선망하며 들여다보곤 했었다.

이후 내가 몇 살 더 먹고 난 후의 일인데, 즐겨듣던 라디오 프로에 대학생이 된 김혜수가 출연해서 단막극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프로그램 구성작가가 쓴 일기 형식의 산문을 김혜수가 받아 읽은 뒤 주인공인 화자 역을 맡아 짤막한 콩트를 하는 코너였다. 그때는 흥미롭게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허세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글이었는데, 이런 식이었다.
내키지도 않는 미팅을 나가서 만난 남자가 사진이 취미라길래 어떤 렌즈를 쓰냐고 물었더니 자동 카메라를 쓴대서 한심했다든지, 밖을 쏘다니며 법석을 떠는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호젓하게 도서관에 틀어박히길 선호한다고 과시한다든가 하는 자아도취형 글이었다. 어쨌거나 당시의 내 얄팍한 취향엔 그럴듯하게 들려서 이렇듯 자세히 기억할 정도로 귀를 기울인 것이다. 더 웃긴 건, 그 코너에서 얻어들은 정보의 영향을 받고 내가 생애 최초로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사 보게 된 일이었다. 미팅남을 비웃어댄 글 꼭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출간된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을 읽었는데 이러쿵저러쿵…….’
지식 밑천이 빈약했던 내게 계시처럼 날아와 꽂힌 제목이었다. ‘권력이동’이라니, 얼마나 있어 보이는 글자인가! 당장 사서 읽고, 결정적 키워드가 포함된 내용을 몇 줄 뽑아서 읊고 다니면 지성 집단을 향해 그야말로 ‘이동(shift)’할 수 있으리란 낙관을 주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가 외국 석학의 사회과학서를 흥미롭게 읽을 깜냥이었을 리가.
독서는 고역이었다. 이해도 못 하면서 설렁설렁 훑었을 뿐이라 독후감이랄 건 없고, 단지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정보가 힘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그게 과연 새로운 인식인지도 의문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논리로 책 한 권을 메울 일인가도 싶었다. 당시의 내게 있어 정보라는 말은 지식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어휘를 사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고, 인터넷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때였다. 미래에 일어날 테크 사회 정보 전쟁의 윤곽을 그 책을 통해 가늠하기엔 나의 배경지식이 백지에 가까웠다.

오십 대의 김혜수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던 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안과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김혜수를 보며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된 그 책이 전면에 내세웠던 용어를 생각했다. 정보.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꾸준히 만방에 알려왔다.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고, 다른 이슈를 다루기 바빠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쪽도 있었고, 으름장 놓기를 좋아하는 푸틴의 평소 습관일 따름일 거라고 본 시각도 있었다.
기습 공격이 목적이었던 러시아의 계획은 정보가 흘러나가는 바람에 김이 빠졌으나 비극은 결국 진행되었다. 그간 언론을 통해 글자로 예고되었던 것들이 사진과 영상으로 구체화 되는 걸 지켜보며 나는 문제의 그 단어를 곱씹었다. 앨빈 토플러가 책 한 권의 지면을 소비해 설파했던 정보의 힘, 그것이 품고 있는 무한대의 결속력과 파괴력에 골몰하게 된 것이다.
정보는 무언가를 벌어지게 할 수도 막을 수도 있다. 사람들을 모으게도 흩어지게도 할 수 있다. 세상을 구할 수도 또 분열로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보는 이제 스스로 변형하는 유기체가 되어서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날뛰는 괴이한 시장 생태계도 만들었다. 앨빈 토플러는 과연 이 모든 것을 예측한 것일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관련 정보는 여러 형태로 조각이 나서 굴러간 곳의 시각, 입장, 여론의 눈밭을 구르며 각기의 몸피를 불리기도 했다. 미국발 정보, 우크라이나발 정보, 러시아발 정보, 인접국들의 역사 및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정보, 반미 정서에 기반을 둔 정보 등등이 유영하면서 온라인 세상에서도 해석과 분석의 전쟁이 횡행했다.
나는 한국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며, 프랑스 학교에 적을 둔 적이 있는 유럽 유학파다. 이후 미국에 정착해 살게 된 나는 선명한 금 안으로 들어가길 주저하는 성향의 인간이 되었다. 입장을 정하기에 앞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다. 국제 사회의 이슈는 물론이거니와 일상 안에서의 단순한 사안을 볼 때도 그렇다.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려는 의지의 일환인 건지, 개인사가 축조한 기질의 반작용인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매사에 온갖 것을 들여다보며 생각을 비틀어보는 게 체화되니 피로할 때가 잦다. 어떤 때는 객관적인 게 옳은지조차 모르겠다. 객관성은 때로 냉소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한국이 모국이라고 K국뽕에 취한다거나, 프랑스 유학파라고 친프랑스적이 된다거나, 미국에 정착했다고 해서 미국적 세계관에 경도되는 것을 골고루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관되게 관조적이지도 못하다. 사안에 따라, 또는 마음이 끌리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존재니까. 그래도 한 발짝 물러나 둘러보려는 의지를 포기 못하는 건 아마도 내가 그 태도에 자존심을 걸고 있어서일 거다.
특정 국가의 편에 서는 것에 대한 거부감 면역 반응일 수도 있다. 일본 유학파 일부가 친일의 선봉이 되어 뒤틀린 식민사관과 정치 풍토를 퍼뜨리는 모습에 질색한 나머지 내가 혹시 이해타산과 정에 이끌린 오판을 할까 봐 내면을 검열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한 곳만을 보고 있진 않다는 것은 안다. 타인을 단순하게 규정했다가 허를 찔리는 경험은 또 얼마나 허다한가.
그렇다면 단순한 건 위험하고 복잡한 건 좀 더 안전한 것일까? 사안에는 큰 줄기, 갈래 줄기, 잔 줄기의 입장과 시각이 골고루 따라붙는다. 섬세하고 촘촘한 것을 간과하지 말자는 쪽이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익사할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정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절망의 색채를 띠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면 극명한 것에서 자유를 얻기도 한다. 힘을 빼도 될 것 같은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러시아 병사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달게 먹고, 누군가가 건네준 전화기로 고향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울먹이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배경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온갖 인사이트를 섭렵하던 중 그 영상을 접했는데, 그걸 보고 나자 더 나아갈 의지가 사라졌다. 거기에 머물고 싶었다.
자주 들여다보는 미국 내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과거사를 축으로 한 각종 정보와 의견이 올라왔다. 세부 지식과 설득력으로 무장한 글들을 훑어내리던 내 손이 어떤 댓글을 보고 멈췄다. 댓글 작성자가 그날 겪은 일을 적은 것이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친분 있는 엄마 둘을 만났고, 하필 그 두 사람이 러시아 출신과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고 했다. 외국 생활 중 이민자들끼리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평상시 같으면 주목받았을 내용은 아니다. 때가 때인지라 두 사람의 모국 간에 벌어진 일 이야기를 비껴가진 못했는데, 결국 둘 다 눈물 바람을 했다는 사연이었다. 러시아 엄마가 우크라이나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먼저 울어서 둘이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는 거였다.
사과와 눈물. 이를 압도하는 답은 무엇일까. 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용의주도해야 한다고 버티는 나와 감정의 서사 앞에서 주저앉는 나는 결국 한 사람이다. 복잡하다가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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