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국화와 함께...국화그림자 놀이 한 정약용
[김세리의 차와술이야기]
[김세리 성균관대 초빙교수] 치명적인 국화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
가을 꽃 국화의 매력이 깊어 가는 계절이다. 고우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국화는 다른 계절 꽃들이 시들어 떨어질 때 즈음 피어난다. 쉽게 지지 않고 오래도록 은은한 향을 자아낸다. 냉정하고 도도한 듯,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한 양면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지금 유행하는 말로 ‘츤데레 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가 오래전부터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아왔다.
국화는 도시를 떠나 산골에 은둔하여 살았던 송대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쪽 울타리 밑에 핀 국화를 꺾어 들고, 고개를 들어보니 유연하게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은 늦가을 서리가 올 무렵 피는 노란 국화와 의연하게 서 있는 남산을 보면서 느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행복감을 시로 남겼다. 그 수많은 꽃 중에서 도연명은 국화를 선택했고, 후대 사람들은 그를 이르러 ‘국화의 남자’라고 했다. 도연명이 느낀 그 감흥이 궁금하다고 국화를 꺾어 들고 서울 남산을, 경주 남산을 뛰어 올라가면 곤란하다. 도연명의 남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남쪽에 위치한 여산(廬山)이다.
가을국화를 바라보기에 그치지 않고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즐기는 이가 있었으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이다. 1796년 어느 가을날 다산은 그의 친척이자 친구인 윤지범에게 밤에 국화구경할 겸 집에서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한다. 촛불을 켜 국화꽃에 비추어 그림자를 즐기는 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옷걸이·책상 같은 모든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물건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해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 국화를 비춘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홀연히 벽에 가득하다. 그중에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과 같고, 그다음엔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 마치 달이 동녘에서 떠오를 때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다.“ -국영시서(菊影詩序) 중에서
정약용과 자리에 모인 벗들은 눈을 부릅뜨고 무릎을 치며 감탄을 연발 했다고 한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며 노는 남자 어른들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순진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국화 그림자놀이에 참가했던 다산의 벗들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즐거워하며 시를 지었다. 선비들의 풍류의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과 차와 다과인데 그렇다면 그냥 술보다는 국화술 그냥 차보다는 국화차가 이 자리에 딱 어울릴 것이다. 그 뒷이야기가 문헌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렇게 준비했을 것 같다. 국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국화주와 국화차, 그리고 국침
‘국화의 남자’ 도연명은 당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오막살이집 담 아래로 국화를 잔뜩 심어놓고 즐겼다. 그런데 혹자들은 도연명이 술을 매우 즐겼기 때문에 술 속에 국화를 넣기 위해, 또는 술안주로 국화를 먹기 위해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도연명이 국화를 눈으로 즐기기만 했는지, 꺾어서 술을 담갔는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나 국화가 예로부터 술에 이용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9월 9일(2021년 기준 양력 10월 14일) 중양절 세시주로 국화주를 마셨다. 찹쌀가루 반죽에 국화꽃잎을 얹어 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잘 익은 술에 국화꽃잎을 띄워 만든 국화주를 마셨다.
‘목은선생문집’의 ‘초파일(初八日)’이란 시에도 중양절에 국화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노란 국화와 흰막걸리가 하염없이 생각나니, 내일 중양절이 또 다시 돌아오겠네.
옮겨 심는 것이 늦었으나 오히려 푸른 꽃술을 따는 것이 낫네.
집이 가난하니 묵은 술을 마셔도 무방하네.
일반적으로 국화꽃을 넣어 빚은 술을 국화주라고 하지만, 술에 국화꽃을 띄어 마시는 것도 국화주라고 부른다. 목은 선생도 흰 막걸리위에 노란 국화를 동동 띄어서 마신 듯하다.
시원하고 향긋한 국화주를 마시고 취했으면, 따듯하고 향긋한 국화차로 국화의 향연을 마무리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국화나 따다가 끓여서 마시면 안 된다.
굴원(屈原)이 ‘초사(楚辭)’에서 “저녁에는 가을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고 했을 때의 국화는 ‘감국(甘菊)’을 이르는 말이다. 식용의 국화는 맛이 달아 감국이라고 한다. 감국은 꽃잎이 단엽으로 조그마하고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우며, 줄기는 붉은빛을 띤다. 색은 부드러운 황금색이다. 따듯한 물에 우러난 국화꽃도 보기 좋지만,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국화향에 내가 국화가 되고 국화가 내가 된다.

국화향연에 완벽을 기하는 팁을 하나 더하자면 바로 ‘국침(菊枕)’이다. 국화꽃잎을 곱게 말려서 베개 속에 넣거나 이불 속에 넣어 그윽한 향기를 즐기는 것으로 일종의 아로마법이다. 국화꽃잎을 넣어 만든 베개를 국침이라 하고 주로 메밀 껍질을 섞어 넣는다. 국침을 베고 자면 머리가 맑아지고 단잠을 잘 수 있다고 한다. 꼭 국화놀이가 아니더라도 잠 못드는 현대인들이라면 국침을 베고 자면 좋다.
국화하기 좋은 계절이다. 국화 그대로를 바라보다가, 밤이 내리면 촛불 그림자놀이를 즐긴다. 국화전 만들어 국화주에 곁들이고, 국화차로 입가심 한다. 국침을 베고 누워 국화향에 잠들고 국화 꿈을 꾼다.
삶의 멋과 아름다운 것들은 주변에 즐비하지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국화향 가득한 나날들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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