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소여는 모험을 계속할 수 있을까?
[홍예진의 애플파이 7] 미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美 필독서 아닌 뜻밖의 이유 부조리 파헤치던 언어들, 현대엔 ‘폭력’일까
마크 트웨인의 마부 복장을 한 청년 가이드가 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대에는 벽지의 금박 꿀벌 문양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데 그 반사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방문자들은 가이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시선을 움직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현직 배우이기도 하다는 가이드의 연극적인 발성과 공감각적 상상을 일으키는 몸짓 덕분일까. 방이 호흡을 시작하면서 과거 그 시대의 기운을 되찾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두 시간 여행자가 되어 마크 트웨인 하우스 손님방의 19세기식 미감에 흠뻑 빠져있을 때였다. 한 할아버지가 벽지와 천장을 유심히 뜯어보면서 의문을 내비쳤다. 꿀벌과 벌집 문양 벽지만도 예사롭지 않은데 천장은 또 거미와 거미그물 문양으로 그득한 것이 기괴하다며, 방을 그렇게 꾸민 까닭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그의 집도 재밌는 모험처럼
가이드는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미국인들이 흔히 그러듯 ‘좋은 질문’이라고 눙치고는 미간에 힘을 준 채 고민에 빠졌다.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기는지 투어 그룹 내 다른 사람들도 답을 구하는 얼굴을 하고 벽지, 천장, 가이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질문을 던졌던 할아버지의 배우자 할머니가 무신경하게 중얼거리며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손님이 너무 오래 진 치고 있지 않게 일부러 이래 놓은 거지 뭘!”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고, 웃음이 헤픈 나는 허리가 휘도록 자지러지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톰 소여의 모험>을 기억하시는가. 소설로 읽지는 않았더라도 현재 중년쯤 된 세대라면 어린 시절 티브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시리즈로는 접하지 않았을까. 낡은 멜빵 바지와 밀짚모자 차림의 톰이 말썽을 부린 벌로 울타리 칠을 하다가 꾀를 내어 친구들을 부려 먹는 장면이라든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증기선의 기적 소리를 배경으로 죽마고우 허클베리 핀과 기행을 일삼는 모습 등이 단편적으로나마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코네티컷주를 구글맵으로 검색하면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저자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저택이 이 지역 주요 볼거리 중 하나로 뜬다. 언젠가 구경해봐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는데 연말에 나들이 장소를 물색하다가 생각이 나서 다녀왔다. 하트포드 시내의 작고 아담한 공원 뮤지엄 형식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옛주인의 훈기와 충만함 배어있는 3층집
마크 트웨인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다. 그가 증기선에서 일하던 시절 사용하던 수심 측정 단위에서 빌려와 지은 필명이 마크 트웨인이다. 그는 미시시피강이 지나가는 중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올리비아라는 뉴욕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 거주한 곳이 내가 구경한 코네티컷의 집이다. 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사랑스러운 세 딸을 키우고 살면서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출판 사업도 벌이며 왕성한 집필을 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 <톰 소여의 모험>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알려진 대로 소설은 엄청난 인기를 얻어 마크 트웨인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집의 구조를 보면 클레먼스 부부는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취향의 표현에 공들이는 유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짜임새 있게 설계된 3층집은 오밀조밀 빈틈없이 고안이 되어있고, 세부 장식들에서는 유행에 다소 무심하며 독자적인 미학을 살리는데 치중한 집주인 부부의 성향이 묻어난다. 저자가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절에 살았던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집 내부에 훈기와 충만감이 배어 감돌고 있다고 느꼈다. 마크 트웨인은 삶의 궤적과 작품을 통해 제국주의, 인종차별, 노예제도를 비판했던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 집의 옛 주인을 기리며 관리하는 재단 측이나 그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경외의 마음으로 그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순순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집 투어를 마친 후 별관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세 꼬마 아가씨들의 귀여운 사진도 보고 작가가 쓰던 집필 책상을 구경하고는 기념품 가게도 돌아봤다. 저택 내부를 촬영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사진집이라도 살까 하고 있는데 어린이용 축약본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 삽화 속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들여다보던 중 문득 내 아이들은 마크 트웨인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학교에서 추천받은 필독 도서 목록에서도 <톰 소여의 모험>은 보질 못했다.
‘톰 소여의 모험’ 필독서 아냐?
옆에 서 있던 큰아이에게 까닭을 물으니,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내용과 어휘가 많아서 현시대의 학교 시스템 안에서는 권장하거나 교육 교재로 사용할 수 없는 도서라는 것이다. 저자로서는 당대의 인종차별 형태를 고발하고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인데, 그 어휘들을 입 밖으로 내어 발음하는 것조차 금기가 된 지금은 교육 현장에서 노출되도록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얼핏 스친 생각은 창작물 안에서 구현된 것들이 결국 다 시대상을 드러내는 것인데 현대의 기준으로 고전을 차단하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곧, 시대상 반영에 무게추를 둔 관점도 아동 보호라는 필터를 끼우면 우겨댈 수 없는 노릇이라는 자각이 왔다. 특정 인종 아동들이 느낄 모멸감과 불쾌함을 상기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활동했던 시기는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끼리 따로 어울려 살던 시대였다. 작품에 사용된 무자비한 표현이 현실의 끔찍함을 비추는 거울은 돼주었으나, 백인과 흑인 독자들이 한 공간에서 그 대목을 읽으며 당혹감을 느낄 상황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피부색의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교육받는 지금은 다르다. 텍스트 안에서 폭력적 인종주의 발언이나 에피소드가 튀어나올 시 내상을 입을 어린 영혼들이 어디에든 있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시대상 묘사 시 구현되어야 할 핍진성을 이유로 들면서 나는 창작자의 자율권에 손을 드는 쪽이었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 방문이 저택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저자의 문학적 업적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쳤다면 그 입장에 진동이 일지 않았을 것이다. 기념품 가게에서 아들과 나눈 잠깐의 대화가 소설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 질문을 던진 계기가 된 것이다.
범위를 넓혀보면 성별, 장애와 관련해서도 얼마든지 창작물을 통한 정서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시대, 인간, 사회의 일그러진 면을 표현할 때 필요한 묘사는 앞으로 어떻게 다룰 것이며, 이미 존재하는 고전과 명작 속 언어폭력은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 것일까. 현시대에 적절하지 않은 설정, 소수자와 약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어휘가 담긴 과거의 위대한 창작물들은 다 어째야 하는 것일까.
‘고전’의 언어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 저작물들을 심판하고 배제한다면 남아날 작품은 얼마나 될까? 고전을 묻어버릴 순 없으니 옥의 티는 둥글리거나 삭제하는 식으로 편집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 과정을 거친 편집본은 과연 이전과 같은 작품이긴 한 것일까? 그러니 앞으로는 창작자의 표현에 제한을 걸어두는 사전 통제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소설가로서, 창작자의 자율권을 우선으로 치던 나의 의식은 교실 안의 아이들 군상과 만나면서 무너져버렸다. 그러고도 여전히 메아리치는 의문들에는 답을 할 수가 없어 어지러웠다.
하트포드 도심을 빠져나올 때마다 나는 늘 헤맨다. 도시에서 살던 기억이 희미해진 바닷가 마을의 소설가에겐 여러 겹으로 얽힌 고가도로가 풀기 힘든 숙제 같다. 도시 정비 프로젝트의 일환인 건지 이번에 보니 시가지의 조명이 한층 더 번쩍이고 화려해졌다. 그 때문에 고가를 돌아 돌아 집으로 가는 방향 출구를 찾는 과정 또한 더 난해한 숙제가 되어버렸다. 대문호가 살던 저택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마음을 가로지르는 겹겹의 질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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