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대만을 위해
[레시피 나라의 앨리스]

아래층으로 내려온 에리카는 식탁 앞에 앉아 숨을 골랐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이들 방 앞을 지나 침실로 가는 중이었는데 남매가 나누는 말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누나. 엄마도 티라미수 먹고 싶지 않을까? 아빠가 티라미수 만들어줄 때마다 기뻐했잖아. 엄마 집에도 좀 가져다주면 어때?”
“말이 돼? 이번에는 아빠가 에리카를 위해 만든 거잖아!”
남매는 주말을 엄마 집에서 보낸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한 시간 후면 아이들 엄마는 집 앞으로 와서 아이들을 픽업해 갈 것이다.
에리카가 아이들 엄마와 대면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차가 집 앞에 와 서면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도착 문자를 받을 것이고, 에리카는 창가에 서서 아이들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면 되니까. 그러고 나면 일요일 저녁이 될 때까지 주말은 오롯이 에리카와 앤디의 것이 된다. 사실 평소의 이 시간대는 일말의 해방감에 들떠서 에리카의 기분이 좋은 때다. 앤디가 에리카의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준 티라미수가 전 부인에게도 자주 해줬던 메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에리카는 온라인 데이트앱을 통해 앤디와 만났다. 보스턴 외곽 지역에 사는 삼십 대 남자라는데, 의외로 많이 배운 체하는 인상이 아니라서 마음이 끌렸다. 프로필 정보를 보면서 이혼 사유가 남자 쪽 과실은 아닐 거라고 막연히 추측한 것도 앤디의 선해 보이는 미소 때문이었다. 메시지와 영상통화를 나누다가 마음을 굳힌 앤디는 매사추세츠에서 조지아까지 날아와 에리카를 만났다. 이후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결혼식은 관례대로 신부인 에리카의 고향에서 치렀고, 에리카는 앤디의 매사추세츠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앤디와 전 부인이 아기방에 분홍색 페인트를 칠했던 집으로.
앤디가 좋은 남자인 건 맞다. 고작 4개월 남짓 되는 결혼 생활이라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한집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 지내며 큰 실망을 준 적은 없으니까. 앤디 쪽에서 아이들을 주중에 맡기로 한 터라 신혼생활이 좀 번잡스럽긴 해도 말이다. 따지고 보면 상대측보다 긴 양육 시간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아빠 쪽의 책임감과 신뢰도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얘기 아닌가.
아이들 엄마가 앤디와 일군 가정보다 일터에서 만난 남자와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집을 나간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앤디는 우직하고 착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까? 너무 착하기만 해서. 거기에 더해 둔하기까지 해서. 아무리 만들 줄 아는 디저트가 티라미수뿐이라고 해도 전 부인에게 자주 해줬던 메뉴를 재혼한 아내의 첫 생일에 해 바치다니. 그 정도의 무신경이 어쩌면…… 아마도…….
에리카는 머리를 흔들며 냉장고를 열었다. 먹고 남은 티라미수가 랩으로 덮여 냉장칸 구석에 누워있었다. 어제는 환호하며 먹었으나 이제는 꼴도 보기 싫었다.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을까 고민하다가 에리카는 힘없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 우울했다. 조지아의 따뜻한 날씨가 그리웠다. 고향 남자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부모님 가까이에서 자주 왕래하며 사는 언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추세츠는 여름조차도 춥고, 사람들도 차가웠다. 에리카의 남부 억양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지역 여자들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에리카는 언니에게 전화나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결국 푸념이나 늘어놓게 될 것이고, 흥분을 잘하는 언니는 편을 들어주다가 오히려 속을 뒤집을 공산이 크다. 언니는 앤디가 북쪽 사람인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에리카더러, 굳이 그렇게 먼 곳에 사는 남자를 만나야겠냐며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남자들 애간장 녹이는 방면에 일가견 있는 언니로서는 답답해서 한 말일 것이다. 데이트 앱에서 짝을 찾고자 할 만큼 외로워 본 적이 없는 언니가 뭘 알겠는가.
에리카가 저기압이라는 걸 알게 된 앤디는 주말 내내 눈치를 보며 맴돌았다. 촉발은 티라미수지만 진짜 문제는 티라미수를 넘어선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앤디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도, 새 직장의 동료 물리치료사들이 텃세를 부리며 까다로운 손님을 에리카에게 떠넘기는 짓을 일삼는 것도, 남부 사투리를 고치느라 초조한 것까지 전부.
“그거 알아? 자신을 악하다고 느끼는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지! 나도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관용이 없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금기의 말이라는 걸 에리카도 모르지 않았지만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감정을 막아내지 못했고, 누르고 눌러왔지만 지쳐버린 것이다. 아이들을 인내하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걸 고작 4달 만에 알아버리다니. 앤디의 사랑이 극진해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다 때려치우고 조지아로 돌아가도 뾰족하게 나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길지 않은 데이트 기간이었지만 처음으로 불안하지 않은 사랑을 경험했고,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세포 하나하나까지 소중히 다뤄주는 사람의 따뜻함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그토록 안전한 사랑을 준 남자의 아이들에게 진저리를 내다니, 에리카는 형편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비참했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앤디를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온 에리카는 침대에 누워 꺼이꺼이 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에리카가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앤디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아래층 주방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내려가 보니 앤디가 아일랜드 스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에리카는 앤디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생소한 냄새가 느껴져 에리카는 코를 킁킁거렸다. 잠시 후 앤디가 내민 것은 또 하나의 티라미수였다. 못 보던 장식이 추가된 새 티라미수.
“에리카. 내가 만들 줄 아는 디저트라곤 티라미수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 앞으로는 다른 것도 배워서 만들어 보려고. 그런데, 당신을 위한 티라미수는 오늘 만든 이것으로 기억해줄래? 이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티라미수니까. 오직 에리카만을 위한 레시피.”
앤디는 티라미수 한 숟가락을 푹 떠서 에리카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에리카는 앤디를 바라보다가 못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 운반물을 떨군 숟가락이 입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나서야 에리카는 알아차렸다. 주방에 떠다니던 향의 정체를. 오렌지 모카.
조지아에서 앤디와 첫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공원에 아이스크림 트럭이 왔고, 아이들이 그리로 몰려가는 걸 보면서 에리카가 말했었다. 오렌지 모카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걸 먹던 중에 대차게 차인 적이 있어서 슬픈 음식이 되어버렸다고. 이제는 그걸 행복의 맛으로 바꾸자고 한 건 앤디였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에리카는 눈을 감고 그날로 걸어 들어갔다. 아이스크림 트럭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던 그날의 녹음 속으로. 앤디를 사랑하겠다고 느낀 오렌지빛 순간 속으로. 눈을 뜨자 그때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날처럼 선한 눈을 하고.
- 레나앨 프로젝트 -

음식- 황창민 셰프
프랑스 파리 꼬르동블루 졸업. 프렌치 레스토랑 라뜰리에, 베이커리 카페 그랑부아, 파사드 운영을 거쳐 현재 다수 기업의 사내 카페 및 라운지 운영 전문업체 ㈜라뜰리에 대표.
사진- 이정민 작가
포토 스튜디오 [단편] 운영자. 사진과 판화를 접목하고, 한지와 패브릭을 활용하는 회화적 사진 작업으로 활동 중. 한국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 문화재청, 한국문화재 재단, 북촌한옥청, 북촌문화센터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전시에 참여. 마켓컬리, 이성당, 에프북언더, 주얼리 브랜드 JIGUM 전속작가.
글- 홍예진 소설가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발표 시작. 산문집 [매우 탁월한 취향], 장편소설 [소나무 극장] 저자. [더 칼럼니스트]에 홍예진의 애플파이 코너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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