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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도 다시 한번

[레시피 나라의 앨리스] 저 별이 온전하게 빛날 때까지

깔끔하고 편안하게 즐기는 여름 채소 요리들
깔끔하고 편안하게 즐기는 여름 채소 요리들

홧김에 나왔으나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건물 앞에 선 기철은 골목길을 흘끔거렸다. 주거지와 상업지가 주먹구구로 뒤섞인 일대가 하루를 마감 중이었다. 옷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건너편 카페도 곧 불이 꺼질 터였다. 기철은 큰길 쪽으로 휘적휘적 걸었다. 좀 참을 걸 그랬나 후회도 되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찬성의 성질머리를 받아주기 버거웠다. 배우의 매니저란 때로 상대의 응석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요즘 들어 그 빈도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찬성이 이번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극도로 예민한 인물이고, 찬성은 뮤지컬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맡았던 인물에서 벗어나느라 무진 애를 먹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한다. 우울증 환자 역을 맡으면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푼수 역을 맡으면 실제로 바보처럼 굴었다. 배우로서 쓰임새 좋은 재능임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요즘 찬성이 보이는 성향도 원래의 성격이 아닌, 극중 캐릭터가 체화되어 불거지는 현상으로 볼 법도 하다. 기철도 이성적으로는 안다. 다만 찬성의 모든 일상에 밀착해 지내는 기철로서는 감당하기 벅찰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식사 전부터 찬성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연의 분장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본 후로 그랬다. 찬성은 리허설 초반부터 분장사와 사이가 틀어진 터였는데, 찬성의 부탁을 흘려들은 그녀가 당사자의 콤플렉스를 두드러지게 하는 머리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게 화근이었다. 찬성은 화를 못 참아 발끈해버렸고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는 분장실의 냉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문제의 분장사가 오늘, 찬성이 경쟁심을 품고 있는 한 배우의 분장을 마친 뒤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외모 착해, 기럭지 착해, 인성은 더 착해! 최고 매너남 우리 강 배우, 흥해라 흥해! “라는 격찬 코멘트를 곁들여서. 분장사야 요즘 뜨고 있는 신예 배우를 이용해 팔로워를 늘리고자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찬성이 그것을 보고 자기를 ‘멕이는’ 포스팅이라며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찬성의 생각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분장사의 속마음이야 알 게 뭔가. 하지만 찬성의 컨디션을 신경써야 하는 기철로서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무마해야 했다. 일부러 호쾌한 태도로 식사에 임한 것도,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불고기에 젓가락질을 한 것도 다 찬성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 시도였을 따름이다. 찬성이 버럭 신경질을 내는 것을 보고서야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우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맛있긴 뭐가 맛있어? 조미료 맛만 잔뜩 나는데! 그리고 이 고기 좀 냄새 나! 양념된 고기 사려면 잘 보고 골라서 사라 좀. 하여간 남의 포스팅을 봐도 그렇고 음식 맛을 봐도 그렇고, 천지분간도 못하고 무뎌서는.”

정말이지 그때는 기철도 젓가락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기철이야말로 입맛이 돌아서 먹은 게 아닌데다가, 불고기는 찬성 때문에 상에 오른 반찬이다. 두 시간이 넘는 공연을 소화하려면 좋든 싫든 찬성은 육류를 먹어두어야 한다. 기철은 본인의 기호에 맞지도 않는 밥상 앞에서 애써 입맛 도는 척을 해 활기를 자아내려고 했을 뿐이다. 배우와 매니저라는 조합으로 두 사람이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 시작하고서부터 늘 해왔던 대로 말이다.

두 사람은 고시원에서 처음 만났다. 각자 고향에서 상경해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동갑내기였고, 기댈 데 없이 서울에 온 처지라는 동질감으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기철이 찬성에게 호감을 느낀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철에게는 없는 걸 찬성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그랬다. 이렇다 할 계획 없이 도시 빈민자가 된 기철과는 달리 찬성에겐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종일 일을 해 돈을 버는 기철에 비해 찬성은 더 허덕였다. 낮에는 뮤지컬 배우 양성 학원을 다니고 저녁에 일을 하니 잠도, 식사도, 체력도 늘 바닥이었다. 파김치 상태로 자정이 다 되어서야 고시원으로 기어들어 오다시피 하는 찬성에게 라면을 끓여주기도 하고, 낮에 사다 둔 김밥 한 줄을 건네기도 한 게 기철이었다.

수차례 오디션에 도전하던 찬성이 드디어 단역 하나를 맡게 되었을 때였다. 소식을 전하는 찬성의 얼굴에서 비치던 광채가 기철의 의식 속 회로 하나에 전극을 일으켰다. 몇 줄 밖에 안되는 가사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찬성을 보며 기철은 자신이 나서도 될 일을 찾은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꿈을 이루어가는 여정에 동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운명인 것만 같았다.

차근차근 배역의 비중을 늘려가며 찬성은 그 바닥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벼락스타로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서서히 인맥을 다져가면서 뮤지컬 경력 배우로 입지가 굳는 중이니 마침내 업계의 중심부로 발을 들인 셈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상한 건, 그럴수록 찬성이 전에 없던 초조와 불안에 시달린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공연이 끝나면 다음에 설 무대가 없을까 조급해했고, 걸핏하면 다른 배우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질투에 사로잡히곤 했다. 겨우 단역 하나를 맡았으면서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과거의 청년은 현재의 찬성과 연결선을 끊어버린 듯했다. 갈수록 예민해지고 경쟁에 몰두하는 찬성을 상대하면서 기철은 지쳐갔다. 저토록 쉽게 망가지는 사람의 재능에 청춘을 걸었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욕지기가 일었다. 등신. 큰길로 나오니 광활하고 화려한 밤이 펼쳐져 있었다. 기철은 불빛이 넘실대는 도시의 바다 한가운데로 비척 비척 끌려들어갔다.

다음날 찬성이 흔들어 깨울 때 기철은 겨우 눈을 떴다. 이기지도 못하는 깡술을 얼마나 퍼마신 걸까. 뱃속에 자갈들이 와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올려다보니 찬성이 밖을 가리켰다.
“너희 어머니가 택배를 보내셨어.”
기철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눕고는 허공에 휘휘 손짓을 했다. 보나마나 반찬과 농작물일 테니 누가 되었든 받은 사람이 냉장고에 넣으면 된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을 알아들은 찬성이 문을 닫고 나갔다. 기철은 뱃속의 자갈을 억누르며 다시 잠에 빠졌다.

정오가 다 되어 기철이 방 밖으로 나갔을 때 찬성은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비몽사몽간에 택배 도착을 전해 들은 때를 제하면 전날 밤 기철이 버럭 화를 내고 나간 이후로 처음 대면하는 거였다. 어차피 찬성이 헤드셋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철도 별 말없이 주방 쪽으로 갔다. 물을 꺼내 마시려고 냉장고를 여는데 주방 구석 바닥에 빈 상자가 있었다. 택배 내용물은 벌써 정리한 모양이었다. 대뜸 찬성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너, 고기 싫어한다며?”

찬성의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손 역시 기계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지만 헤드셋은 내려와 목에 걸려 있었다.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택배 여니까 메모 한 장이 봉투도 없이 내용물 위에 놓여있더라고. 얼결에 읽었어. 쏘리. 고기 잘 안먹는 애가 여름에 뭘 먹고 지내느냐고 걱정하시던데. 아, 메모는 거기 뒀어. 그 위에 컵받침으로 눌러둔 거.”

기철은 식탁 위에 놓인 컵받침을 흘끗 봤다. 엄마의 글씨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받침 아래 깔려있었다. 몇 줄의 메모, 그리고 레시피였다. ‘여름에 먹기 좋은 채소 요리.’ 엄마가 최근에 다니기 시작한 퓨전 음식 강좌에서 새로 배운 것이겠지. 찬성은 기철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게임을 지속했다. 이어 찬성의 몸에서 빠져나온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더듬더듬 메웠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서울로 온 진짜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무서웠다고. 도망간 제 어미를 닮았다며 술에 취할 때마다 아들을 두들겨 팼던 아버지. 기어이 술 때문에 객사한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에서 사라졌음에도 기억이 따라붙을까 두려워 고향을 떠났다고. 무대에 서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살면 기억이 밝아질까 기대했었다고. 하지만 공연 하나가 끝날 때마다, 무대 뒤의 공허함이 밀려들 때마다 죽도록 얻어맞던 기억이 와락 달려든다고.

무대에 설 때와는 달리, 찬성은 어조에 높낮이를 두지 않았고 표정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래도 기철은 안다. 지금 찬성의 내면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그걸 알아볼 만큼은 찬성을 살피고 지낸 시간이 있었지 않나. 기철은 제 눈물의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찬성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물살이 잦아들고 사위가 고요해지면 그를 건져내 말려주어야 할 것이다. 별빛은 밝을 때도 있고, 흐릴 때도 있다. 별이 온전한 빛을 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 또한 매니저의 몫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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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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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황창민 사진 이정민 소설 홍예진 그래픽 최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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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앨 프로젝트

신개념 요리 컨텐츠 [레시피 나라의 앨리스]를 위해 모인 사람들. 셰프 황창민, 사진작가 이정민, 소설가 홍예진이 빚어내는 [레나앨 프로젝트]는 음식 및 요리법에 초단편 소설을 곁들여 소개한다. 입체적 요리 컨텐츠를 추구하는 크리에이터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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