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만드는 사람
[레시피 나라의 앨리스]
은하수와 폭포. 사람들은 이걸 보러 우리 마을에 온다. 마을에 활기가 생긴 건 근래의 일이긴 해도 말이다. 사실 우리 마을은 인구가 워낙에 적고, 전에는 방문자들도 다 내국인이었다. 마을로 외국인 여행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새의 일이다. 아무리 절경이라지만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음, 그러니까, 먼 길 떠나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의 여파가 크기는 했었다. 온갖 장비를 대동한 미국인들이 이 일대에 와서 영화 촬영을 한 이후로 우리 마을까지 외지인들이 찾아오게 되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마을은 영화 촬영지에서 꽤 떨어져 있는데,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은 역시 못 당해내는 것일까? 대체 왜 이 섬까지 찾아오는 건지 모르겠다. 계절도 반대인 곳에서.
“키아라, 모르겠어?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는 거야! 뉴질랜드는 그들에게 없는 게 있는 곳이잖아. 눈이 그리울 때 눈을 보고, 따뜻한 태양이 절실할 때 태양을 볼 수 있는 곳.”
토마린은 세상 이치를 다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기껏해야 나보다 두 살 많으면서 어른처럼 굴기는. 어쨌든 토마린이 이런 태도로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기가 죽는다. 나는 토마린처럼 섬 밖으로 놀러 나가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토마린에게는 북섬에 사는 이모가 있다. 그것도 수도인 웰링턴에. 작년까지만 해도 토마린은 웰링턴의 이모 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올여름에는 마을에 남아 나처럼 협곡 래프팅 인솔로 돈을 버는 중이다. 이웃 어른들이 수군거리기를, 토마린의 사촌 동생도 많이 컸으니 베이비시터가 필요 없어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토마린의 이모 내외가 식당 일손이 바빠지는 여름이면 시골의 조카를 불러들여 아이 돌보는 일을 맡겼던 것이라나.
어릴 때부터 토마린을 따라다니며 놀았던 나는 토마린이 웰링턴에 가지 않고 여기서 함께 여름을 보내니 좋긴 하다. 하지만 토마린은 어쩐지 풀이 죽어있다. 말로는 자기도 열여덟 살이 되었으니 여름 내내 이모 집에서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마을에 남아서 해야 할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계획하기로 치자면 도시가 더 낫지 않나? 언젠가 넌지시 떠봤을 때 토마린이 슬픈 얼굴로 말하긴 했지만.
“키아라, 마오리족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아. 난 자신 없어. 내가 그들처럼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아.”
상류에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인솔할 승선자 여섯 명 중 넷은 영국에서 온 가족이고, 나머지 둘은 오클랜드에서 온 대학생 남자 둘이다. 안전 수칙 설명을 끝내고 나니 대학생 중 한 명이 내게 마오리 말로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합니다, 라고. 요즘 백인들 사이에서 마오리어 배우는 게 유행이라더니. 하기야, 아던 총리도 아기의 중간 이름에 마오리말을 넣었으니까 뭐.
마오리어에 관심을 보이면 의식 있어 보이는 시대라니, 저 사람도 날 조롱할 의도는 아니었을 거다. 촌구석의 열여섯 살짜리라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 무엇보다, 저렇게 선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나를 놀렸을 리는 없다. 분명히.
승객들의 헬멧과 구명조끼를 체크하고, 배에 올라탄 토마린에게 사인을 보냈다. 보트를 밀어 보낸 뒤 선착장의 너른 바위에 올라서서 토마린과 승객들을 실은 보트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지켜봤다. 어쩐지 토마린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데 토마린은 금세 자세를 고쳐 앉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물살이 세지면서 승객들이 함성을 지르는 지점을 향해.
“키아라! 오늘 하루는 어땠니?”
집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올리버가 물었다. 올리버는 이 시간이면 늘 자기 집 앞마당에 캠핑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8년 전 올리버가 우리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수군댔었다. 호주에서 도망쳐온 범죄자일 거라고도 했고, 금융계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던 사람이었을 거라고도 했고, 은둔한 예술가일지 모른다고도 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밝혀진 건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제 올리버를 경계하지 않는다. 그가 마오리족이 아닌 걸 더 이상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다. 올리버는 이제 마오리다. 백인 마오리.
나는 올리버 옆으로 가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으로 곧장 가기 싫었으니까. 평소에 그러듯 올리버에게 또 주절주절 다 털어놓았다. 일과가 끝나 보트와 노를 정리하고 있을 때 토마린이 선언하듯 뱉은 말에 대해서, 마오리어로 말을 건 남자에 대해서,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 마오리 전통 무예 공연자로 살겠다는 토마린의 결심에 가라앉는 내 마음에 대해서.
“키아라, 토마린이 가는 길과 네가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욘 없단다.”
토마린을 따라다니며 놀던 나를 지켜봐 온 올리버여서 그랬을까.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진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올리버, 나는 대학에 가고 싶어요.”
말을 뱉고 나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았다.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 처지에 그런 꿈을 꾼다는 게 어처구니없다는 걸 아니까 내심을 꺼내놓은 게 부끄러웠다. 가난을 족쇄로 느끼지 않는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으나 사실 나는 간절하게 탈출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을을 떠나는 게 두렵기도 했는데, 그래서 오늘 그 남자처럼 눈부신 존재들은 애당초 곁눈질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토마린의 결심을 듣고 나니 마음에 구름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도시를 구경해 본 토마린도 주저앉아 버리는데, 나 같은 게 어떻게 마을을 벗어날 수 있을까. 올리버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흐르는 동안 마을에는 어둠이 깔렸다. 대기가 맑은 날이어서 별들이 선명했다. 올리버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오늘은 유독 별이 좋구나, 키아라! 저 하얀 은하수를 보면 말이야. 이상하게 그게 생각나. 다른 건 하나도 그립지 않은데 그것만은 정말이지 그립단 말이야.”
나도 올리버를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솔직히 별 감흥은 없었다. 은하수 따위, 내게는 그저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 같은 거니까.
줄리아가 가져온 쟁반에는 장미꽃 문양의 찻잔, 그리고 같은 문양의 접시에 담긴 ‘그것’이 있었다. 올리버가 말했던, 이 베이커리 특선 파블로바. 줄리아는 몇 살쯤 되었을까? 삼십대 후반? 사십대 중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줄리아는 언젠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인 중년 여자의 표본이었으니까. 마을의 실없는 노인에게 이렇게 근사한 딸이 있었다니 올리버가 다시 보일 지경이었다.
올리버가 집으로 찾아와 엄마와 나를 앉혀놓고 긴 대화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오늘, 웰링턴의 한 베이커리에 와있다. 앞으로 나는 줄리아의 집에 살면서 학교에 다닐 것이고, 수업이 끝나면 베이커리 일을 돕게 될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조건 아닌가. 나를 거두어주기로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될 방법이고, 올리버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게 될 2년 후까지 나는 반드시 줄리아의 파블로바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말 거다. 마을로 돌아갈 때마다 올리버에게 만들어줄 수 있게.
“키아라,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넌 그곳에서 너의 은하수를 만들 거다. 고향에 은하수를 두고 온 사람이니까.”
나는 마을을 떠나기 전 올리버가 해준 말을 되뇌며 포크를 들었다. 올리버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줄리아의 파블로바. 포크가 닿는 순간, 파블로바 표면이 바사삭 부서졌다. 깨진 조각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혀끝의 단맛이 사라지기도 전에 마을이 왈칵 그리워졌다. 내가 깨고 나온 껍질 안쪽의 말랑한 것들이. 파블로바는 마을이었다. 올리버의 은하수가 줄리아인 것처럼.
- 레나앨 프로젝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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