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렬? 아니, 진짜 협상의 ‘시작’이다

미국 협상단과 이란 협상단(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미국 협상단과 이란 협상단(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 협상 결렬의 역설 이번 빈손 회동은 끝이 아니라 47년 만의 대면을 통해 서로의 마지노선을 확인한 ‘정상적인 협상의 시작’이다. 과거 중동 평화 조약들도 초기의 결렬 위기를 극복하며 탄생했다.
  • 이란의 절박한 신호 협상 테이블에 중앙은행 총재를 대동한 것 은 이란이 단순한 명분 싸움이 아니라 경제 제재 해제와 동결 자산 확보라는 실무적 성과를 당장 얻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임을 방증한다.
  • 향후 2주의 향방 트럼프의 ‘딜 메이커’ 자존심과 이란의 경제적 한계가 맞물려 중간 단계의 합의 가능성이 높으나,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과 호르무즈 긴장 등 외부 변수가 최종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협상 결렬? 오히려 안도하는 이유

미국·이란 첫 협상이 깨졌다고 난리다. 그런데 중동 관련 협상, 한 번에 된 적 거의 없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미국과 이란 협상단이 파키스탄을 중재자로 두고 21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을 벌였다가 빈손으로 헤어졌다는 소식이 나오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결렬’을 붙였다. SNS에서는 벌써 “3차 세계대전 오나”는 말이 돈다.

오랫동안 카이로, 베이루트, 바그다드, 무스카트를 밟으며 이 바닥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는 이 소식을 보고 오히려 안도했다.

이유가 있다. 첫 판에 합의가 나왔다면, 그게 오히려 위험한 신호다. 누군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크게 양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협상이 잘 된 게 아니라, 나중에 더 크게 깨질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사전 협의없는 협상, 전례가 없었다

미국과 이란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부터 짚어야 한다.1979년 이란 혁명 이후 47년 만의 첫 최고위급 대면이었다

지난 반세기동안 두 나라는 직접 대화를 거의 피해왔다. 오바마 행정부 시기 이란 핵합의(JCPOA)로 이어진 협상이 가능했던 것도, 공식 협상 전에 오만 등에서 여러차례 비밀 접촉을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핵심 쟁점 상당 부분이 물밑에서 조율된 뒤에야 제네바 공식 테이블이 열렸다. 공개 회담은 이미 준비된 협상의 연장선이었다.

이번엔 다르다. 전쟁이 멈춘 직후,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적으로 규정해온 두 나라가 뚜렷한 사전 조율 없이 같은 방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왜 빈손으로 끝났나. 간단하다. 양측의 요구가 처음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란은 제재 해제, 동결 자산 해제, 호르무즈 문제, 그리고 레바논 전선까지 포함한 포괄 구상을 들고 나왔다. 미국은 핵 개발 중단과 핵무기 관련 능력 포기를 요구했다.

쉽게 말해, 이란은 “제재부터 풀고, 우리가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나왔고, 미국은 “핵 개발부터 중단하라”고 나온 것이다.

‘서로의 한계를 진지하게 확인했다’는 큰 의미

이 둘이 첫날 만나서 합의문을 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협상은 합의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21시간을 앉아 있었다는 건 그 확인이 진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 대표단이 이슬라마바드를 떠났다는 소식이다. 이걸 보고 “협상이 끝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국제 협상에서 이건 전혀 다른 의미다.

첫 회담에서 서로의 요구와 한계를 확인하면, 양측은 보통 각자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계산한다. 어디까지 물러설 수 있는지,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는지, 다음 판에서 무엇을 카드로 쓸지.

협상을 끝내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니라, 협상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진짜 협상은 회의실이 아니라 각자의 수도에서 진행된다.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만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왼쪽부터)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만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왼쪽부터)

중동 협상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 있다

중동 협상의 역사를 보면, 첫 판 빈손은 거의 공식처럼 반복돼 왔다.

1978년 미국 대통령의 별장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가 미국 카터 대통령의 별장에 모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네 차례 전쟁을 치른 사이였다.

협상은 막판까지 깨질 뻔했다. 사다트는 짐을 싸고 헬기를 불렀고, 베긴도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카터는 베긴을 찾아가 베긴의 손주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넣은 사진을 건넸다. 베긴이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겠다”고 했다.

카터가 합의 초안을 여러 차례 다시 쓴 끝에 나온 그 합의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의 출발점이 됐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공식 협상은 번번이 막혔다. 이스라엘은 PLO를 테러 단체로 규정했고, 양측은 공개 테이블에서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다 노르웨이 연구기관 FAFO를 배경으로 한 비밀 채널에서 양측 실무진이 조용히 접촉을 이어갔다. 언론도 몰랐고, 양측 지도부에도 초기엔 극히 제한적으로만 공유됐다. 그 결과가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잔디밭에서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의 역사적인 악수였다. 겉에서는 안 되는 동안, 안에서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미국과 이란의 핵협상도 같은 흐름이었다. 초기 제네바 회담은 합의없이 끝났고, 프랑스가 더 강한 제한을 요구하며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불과 2주 뒤, 잠정 합의가 나왔다. 이후 협상은 수차례 연장됐고, 결국 2015년 최종 타결로 이어졌다.

그래도 이번 협상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이번에도 잘 될 거라고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

이번 협상은 훨씬 복잡하다. 핵 하나가 아니라 경제 제재,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 레바논 전선, 미사일 능력, 지역 질서까지 모두 얽혀 있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넓은 협상이 아니라, 하나가 틀어지면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다.

무엇보다 지금은 협상장 밖이 더 불안하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선을 이번 미·이란 휴전과 별개로 보고 있고, 이란은 레바논 문제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고 버티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협상이 진행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레바논 공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건 조건 싸움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협상하고 있는지 그 전제 자체가 다른 상황이다. 이번 협상의 가장 큰 변수는 협상장 안이 아니라 바깥이다.

그럼 남은 2주 동안 어떻게 될 것인가.

핵과 호르무즈 같은 핵심 쟁점을 한번에 다 해결하는 완전한 합의는 이번에 나오기 어렵다. 그 대신 핵심 쟁점은 뒤로 미루고, 호르무즈 해협 통항 일부 정상화, 동결 자산 일부 해제, 다음 회담 일정 합의 정도를 묶은 중간 단계 합의가 나올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이유가 있다. 트럼프도, 이란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다.

이란이 봉쇄하고 있는 호르무즈해협에 대해 미국 함정을 동원한 '역봉쇄' 계획을 밝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진=KBS뉴스 캡쳐
이란이 봉쇄하고 있는 호르무즈해협에 대해 미국 함정을 동원한 ‘역봉쇄’ 계획을 밝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진=KBS뉴스 캡쳐

이란은 왜 중앙은행 총재를 데리고 왔을까

트럼프는 이미 공개적으로 “2~3주 안에 이란에서 철수하겠다”고 못 박았다. 스스로 마감 시한을 잡아버린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오면 그의 최대 자산인 ‘딜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깨진다.

이란도 마찬가지다. 6주간의 전쟁으로 석유화학 시설, 철강 공장, 항만이 두들겨 맞은 상태다. 경제가 버텨줄 시간이 많지 않다. 협상 테이블에 중앙은행 총재까지 데려왔다는 건, 제재 해제와 동결 자산 문제를 당장 실무 논의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트럼프는 “해냈다”고 선언하고, 이란은 “미국이 물러섰다”고 자국 국민에게 내세운다. 양쪽 다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구조다.

최악의 경우는 단순하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레바논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판을 뒤집으면, 이란은 협상 테이블을 떠날 명분이 생긴다. 그 순간 지금의 휴전은 의미를 잃는다.

여기에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다시 높아지는 순간, 이 갈등은 중동 분쟁이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위기로 번진다.

지금은 협상이 안 된 게 아니라, 서로의 마지노선을 확인하기 시작한 단계다. 남은 2주는 그 마지노선을 좁히는 시간이다. 비관은 이르다. 그렇다고 안심도 이르다.

(문병준 대리대사께서 트럼프의 ‘호르무즈 역봉쇄’이후 다시 코멘트를 주셨습니다.)

협상 결렬 직후, 트럼프는 호르무즈 해협 ‘역봉쇄’까지 거론했다. 이를 협상 결렬 신호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실제로는 협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형적인 압박에 가깝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협상이 깨지는 과정이라기보다, 협상이 시작되는 방식에 가깝다.

이 글은 문병준 전 사우디대사대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문병준 전 주사우디대사대리

문병준은 외교부 중동 지역 업무를 중심으로 경력을 쌓은 외교관 출신이다. 주이집트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로 근무했으며, 과거 외교부 중동2과장을 역임했다. 2021년 6월 주두바이 대한민국 총영사로 부임해 교민 안전, 경제·문화 교류를 담당했고, 202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대사대리(Chargé d’affaires ad interim)로 공관장 직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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