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아Q는 누구인가?

서평:『아Q정전(阿Q正傳)』루쉰(魯迅) 신해혁명때 중국, 자기합리화와 ‘강약약강’ “한국, 자신만 잘살겠다는 천민자본주의 아Q처럼 ‘정신승리법’에 빠진 건 아닐까”

루쉰 동상
루쉰 동상

루쉰(魯迅)은 중국의 민족혼을 다시 불러 일으킨 현대 중국문학의 선구자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의사가 되려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일본인에 핍박받는 중국인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유학을 포기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문학으로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겠다고 결심한다. 그런 루쉰이 1921년 발표한 『아Q정전』은 당시 중국의 지성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청(淸)왕조가 막을 내리고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의 신호탄이 된 신해혁명(1911년) 직후 중국 인민의 모습을 그린 『아Q정전』.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중국 인민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루쉰의 아Q정전 표지. 출판사 문학동네
루쉰의 아Q정전 표지. 출판사 문학동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아Q

중국의 농촌 웨이좡(未莊)에 사는 아Q는 이름과 본적은 물론, 살아온 내력도 분명치 않은 사내다. 마을 사당에 살고 있지만 직업도 뚜렷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허드렛 일을 하며 살아간다. 타인과 말다툼이 나면 ‘나도 왕년에는 훨씬 잘나갔다’라며 자존심을 세우고 무시하기 일쑤다. 늘 타인에게 곤욕을 당하지만 아Q는 나름의 정신승리법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세상을 살면서 이럴 수도 있지’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기에 절대로 위축되지 않는다. 때론 자기보다 약자인 사람들을 오히려 더 홀대하기도 한다. 상대방을 잘 살펴서 어눌하면 욕을 퍼붓고, 힘이 약해 보이면 두들겨 패 준다. 지역의 유지 자오(趙) 나리와 같은 성씨라고 떠벌리고 다니다가 발각되어 매를 맞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때린다’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인다. 결국, 자오 나리의 하인 우씨 어멈에게 수작을 걸다가 걸려 웨이좡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다.

수개월 후 아Q는 두둑한 재산을 가지고 웨이좡으로 되돌아온다. 그가 성안에 있었다는 소문이 나돈다. 실제로 아Q는 성안에서 얻은 진귀한 물건을 마을에 되팔며 생활한다. 그 스스로 전과는 대우가 달라짐을 느낀다. 어느 날 혁명이 뭔지도 모르지만, 혁명단원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본 아Q는 혁명이 좋은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일자무식의 아Q를 혁명단원들이 받아줄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Q는 자오 나리의 재물을 털어간 범인으로 지목된다. 관아에 잡혀온 아Q는 까막눈이기에 진술서에 내용도 모르면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리고, 자오 나리의 집을 강탈해간 진범으로 몰려 체포된다. 포박된 채 마을을 돌아다니며 놀림을 당해도 그의 인생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마침내 사형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무감각하다. 그 특유의 정신승리법이 발현된 탓이다. ‘살다 보면 뭐 죽을 수도 있지’ 하면서 담담히 형장으로 가 마침내 총살당한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 중국 인민들이 대오각성하기를 바랐다. 신해혁명 즈음의 중국은 서구 열강들과의 연이은 전쟁에 연전 연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 인민들은 여전히 ‘대국’임에 자만하고 있었다. 루쉰은 옛것에 집착해 변화가 필요한 위기에도 무감각했던 중국 인민의 몰지각을 아Q의 ‘정신 승리법’이라는 장치를 통해 풍자하려 했다. 이름도 분명치 않은 아Q는 중국 인민 대중을 상징했다. 암울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아직 건재함을 맹신했던 중국 인민들의 몰지각과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루쉰이 지적한 이유는 ‘생각함의 부재’였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니 과거에 매몰되어 변화에 무기력했음을 아쉬워했다. 혁명에 대한 시각 또한 달랐다. 혁명이라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을 통해 행동 변화가 많아질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서서히 시작된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한국사회, 집단적 자기합리화의 위험

이 책은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준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 집단으로 승화될 때의 폐단이다. 최근에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말은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자세는 중요하다. 답답한 현실에서 마음의 자세를 고쳐서 안정을 찾는 미국 심리학자 앨렌 랭어 교수의 ‘마음 챙김’도 유행이다. 고난을 즐기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남을 강조하는 ‘회복 탄력성’도 회자된다. 개인적인 차원의 합리화가 적정 수준일 때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집단으로 확대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현실적 고통을 회피하는 자기합리화가 집단으로 발현되면 국가는 무기력의 나락에 빠지거나, 민족주의와 결합된 집단적 나르시시즘인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또는 복수)’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격했다. 대중이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잘못된 판단을 하고도 무지한 상태에 놓일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변화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겸허히 인정하고 직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해외명품 가격인상 직전에 서울 모 백화점 본점 앞에서 소비자들이 매장 문이 열리기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해외명품 가격인상 직전에 서울 모 백화점 본점 앞에서 소비자들이 매장 문이 열리기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두 번째는 조작된 디지털 및 언론 정보에 대한 맹신 현상에 대한 경고다. 100여년전 망국의 위기에 놓인 중국에 비해 현대는 정보가 차고 넘쳐난다. 필자는 역설적이게도 과거 중국에 비해 현재가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알고리즘이 선택한 정보만을 추출하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집단간의 불신과 반목의 씨앗이 된다. 마약처럼 선별된 정보는 점점 중독되기 쉽다. 변연계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미국의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 교수의 저서 『중독의 시대』 에서는 디지털 중독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쾌락과 중독의 패러다임에 연결성과 이동성이 결합되어 현대의 가장 심각한 중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그 정보가 조작되거나 왜곡된 정보라면, 대중은 그것이 잘못된 정보인지 자체에 무지하게 된다. 섬뜩한 대목이다.

세 번째는 ‘강약약강’ 현상에 대한 경계다. 소설의 아Q는 작은 것에는 발끈하면서, 큰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자기 합리화에도 연결된 이것은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 대해 더 날을 세우고, 강자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는 현실은 이 소설속 중국과 현재의 우리나라가 복제판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우리도 최근에 ‘갑질 문화’에 대한 자성이 있었다. 경제력을 능력으로 간주하는 현실과 학벌이 합쳐져 특이한 능력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시사하는 점은 무조건적인 과거의 영광이나 제도에 대한 집착이다. 민주화 세대도 어느 덧 기성 세대가 되었다. 스스로가 기성 세대임을 과감히 인정해야 한다.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에서 어느덧 불통과 집착에 매몰된 민주화 세대를 그렸다. 위계의 문화는 연대와 역동성 부분이 강점이라 말했다. 하지만, 다음 세대로의 권력이양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불통을 과감히 인정하고 권력이양이 이루어져야 새로운 변화의 방향도 잡힐 것이다. 하물며, 냉전 논리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세력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냉전 논리에 머물러 있는 세력은 아Q같이 정신승리로 무장된 수구에 불구하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새로운 발전도 있다.

루쉰의 『아Q정전』을 보면서 그가 중국 인민에게 경종으로 울리려 했던 것은 과장된 ‘정신승리법’에서 촉발된 자기 합리화였다. 나라가 위기에 닥쳐도 ‘자신만 잘 살겠다’는 천민자본주의도 확장된 ‘정신승리법’의 발로가 아닐까? 100년 전 중국 인민의 우매함은, 현대의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글쓴이

이기환 독서 인플루언서

필자인 이기환 독서 인플루언서는 중앙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일본 화학회사에서 오랜 기간 전자재료 마케팅을 담당했고, 이후 SKC에서 신규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연간 120여권이상 책을 읽고 있는 독서광이다. 현재 네이버 도서 인플루언서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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