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비난한다
서평:『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황색언론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여성 이야기 언론의 조작에 의한 폭력은 얼마나 잔인한지
1985년 7월 16일은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사망한 날이다.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뵐은 전후 독일의 정신적인 폐허를 직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작품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사망한지 37년이 지났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1975년 발표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다.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출간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과서와 대학 언론학과의 교재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작품이다. 요즘 한국의 언론 현실을 보면 이 작품의 의미가 더 빛을 발한다.
‘살인자의 정부’로 몰린 여성
이 작품은 평범한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지인이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초대되고 한 남자를 만나 즐겁게 춤을 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강도 및 살인 사건의 용의자 괴텐이었다. 엉뚱하게도 카타리나는 살인자의 탈출을 도와줬다며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게 된다. 혼자되었지만 정신적 충실함과 자긍심이 충만했던 그녀가 갑자기 황색 언론인 ‘자이퉁’에 의해 살인자의 숨겨 놓은 애인으로 둔갑한다. 그녀를 가정부로 고용하고 물심양면 도와주던 좌파 변호사와 사업가인 볼로르나 부부도 함께 ‘빨갱이’로 몰리게 된다. 경찰에 의해 혐의를 조사받는 중이고 그 어떤 확정적인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카타리나 자신과 그녀의 지인들은 ‘자이퉁’이 만들어낸 가공된 기사에 의해 이미 공범이 된다.
언론에 의해 카타리나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자이퉁은 악의적으로 내용을 날조하고 왜곡한다. 사실과는 무관한 흥미 위주의 기사와 조작된 보도가 계속될 수록 카타리나의 고통은 심화된다.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자 그녀의 우편함에는 기사 내용만 믿고 악담은 물론 빨갱이, 변태로 일컫는 편지로 넘쳐난다. 성인용품 박스를 보내는가 하면, 자기와도 하룻밤 같이 보내자며 조롱하는 소위 식견 있는 ‘신사’들로부터의 편지도 있다.
죽음으로 끝난 황색언론
마침내 그녀의 주변을 철저히 탐문하던 기자 퇴트게스가 암 수술을 받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블룸을 찾아가 딸의 사건을 알리게 되고, 마리아는 그 충격으로 결국 죽게 된다. 이제 카타리나는 언론의 폭력 때문에 사회적 명예가 실추되고, 지인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가족도 목숨을 잃게 되는 처지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도와주던 지인들도 소송에 휩싸이는 모습을 목격한다. 결국 그녀는 경찰의 조사가 시작된 지 5일만에 자이퉁의 기자 퇴트게스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스스로 살인자가 된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 한 평범한 여인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 뵐이 이 책에서 독자에게 진정으로 전하려 했던 것은 살인이라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황색 언론들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다. 독자들은 내용을 읽어갈수록 자연스럽게 언론 폭력의 과정을 직접 느끼게 되고 치를 떨게 된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무분별하고 도에 지나친 언론의 폭력은 잔인하다. 언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자신의 필요대로 능수능란하게 이용한다.
카타리나는 사회적 소외 계층의 전형으로 그려졌다. 아버지는 광부였고, 어머니는 병자였다. 오빠는 절도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 있다. 그녀 자신도 유복하지 못한 가정을 벗어나고파 이른 결혼을 선택하지만, 이혼하고 가정부로 살고 있다. 그러니 대중의 선입견은 매몰차다. 그녀가 사회적 약자였기에, 언론이 그녀를 살인범 괴텐의 공범으로 몰아갈 때도 대중은 너무도 쉽게 호도된다. 언론이 제조하는 익숙한 확증 편향에 놀아나는 모습이다.
‘유서 대필사건’도 책임자 처벌없어
여기서 언론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을 가공하고 날조하는 언론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특히, 공권력과 언론이 만나 하나가 되면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진다. 사실 하인리히 뵐이 이 작품을 쓰게 된 모티브가 되는 사건은 1972년 하노버 공대 교수 페터 브뢰크너 사건이다. 브뢰크너 교수는 언론에 의해 조작된 여론 때문에 해직되고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음에도 그의 명예는 수년간 회복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건은 많지만, 1991년 분신 사망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산 강기훈 씨의 소위 ‘유서 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1991년 분신 정국을 다룬 영화 <1991, 봄>과 동명의 책에서 감독 권경원 씨는 언론이 정권의 시녀에서 언론 권력이 되는 과정을 소개했다. 공안 권력과 언론 권력의 합작품인 이 사건에는 피해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음을 한탄한다. 결국 강기훈 씨는 24년만에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그가 당한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책임지는 자가 없다.

이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뉴스만 듣는다. 알고리즘이 만들어 내는 ‘필터 버블’을 통해 오늘날 대중은 특정 사실에 대해 편협하고 왜곡된 이미지를 더 쉽게 갖게 된다. 문제는 그럴수록 우리는 더 고립되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의식 있는 독자 대중이 필요하다. 더불어 지금이야말로 정도를 걷는 언론의 역할이 부각된다. 언론은 우선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사실을 전달하고 나서 자신만의 시각과 논리로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 언론이 날조된 사실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것은 대중의 눈과 귀를 막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언론, 어디에 서있는가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있는 현실이 위험하다. 문제가 생겨도 아니면 말고 식의 결말도 대단히 무책임하다. 검증되지 않은 언론이 너무도 많다. 반면 오늘날 그 어떤 세력보다 전방위적 폭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론뿐이다. 황색 언론에 의해 실추된 피해자의 명예는 누가 회복시켜 줄 것인가? 공권력과 공조하여 실질적인 권력이 된 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1975년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보면서 필자는 언론에 의해 어떻게 폭력이 시작될 수 있는 지를 볼 수 있었다. 오래 전 작품을 보면서도 오히려 익숙한 현실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시대의 비극이다. 지금 우리의 언론은 어떤가? 언론이 든 칼이 자신있게 권력을 견제하고 사실을 전달하며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서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