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존엄하며, 실격당할 수 없다”
서평: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장애인 ‘잘못된 삶’ 아냐...그대로 존중받아야 지하철탑승 시위, 근본적 해결위해 나서야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1984년 9월 19일, 남대문 시장에서 공예품을 판매하던 지체장애인 김순석 씨가 서울시장에게 유서를 쓰고 음독 자살했다. 유서의 내용은 서울 시내 건물과 횡단보도의 문턱 때문에 장애인의 통행이 어렵다며 시정과 함께 장애인 화장실의 설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본다면 당연한 요구를, 그는 왜 목숨을 던져야 했던 것일까?
그의 죽음이 기폭제가 됐는지, 1988년 <장애인복지법>이 탄생한 이후 1990년대 들어 장애인의 사회권 보장에 대한 논의가 증폭됐고 2007년의<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신체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2018년작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란 책의 내용이다.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장애인 지위에 대한 현실 폭로나 사회로부터 온정어린 손길에 호소하는 단편적인 장애인 관련 서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상’사회의 표준에 대해 되새겨보고 그 속에서 ‘실격당한 자’들로 규정되는 장애인에 대해 정상사회로 편입하라는 압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 책이다. 장애인에 드리워진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는, 품격과 존엄의 차이라는 철학적 접근을 통해 이들의 생이 ‘잘못된 삶’이 아님을 입증하고자 했다.
반면, 사회적 차별의 순간에 침묵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노련하게 포장하는 자세 대신에 장애인 스스로도 ‘수용’을 통해 당당히 자신의 삶에 대해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장애인의 권리가 사회복지 시혜 차원의 사회권이 아니라 자유권의 범주에서 당당히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사회 속에 공명을 일으키고 선순환 되어서, 장애인을 포함한 소수자와 우리 모두에게 상호 존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 책을 끝맺는다.
장애인은 배려 아닌, 마땅히 존중받아야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관심 밖에 있던 장애인 주변의 비합리적인 상황들을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치인 후원행사속에서 장애인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행사를 주도한 정치인의 훈시에 가까운 언행에 이어, 장애인들이 “이런 행사가 무척 고맙다”고 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지점에서, 저자는 예상외의 화두를 던진다. 장애인인 저자가 이런 행사를 직접 체험하면서 느낀 것은 장애인의 진정한 목소리에는 관심 없고 오직 수혜를 주는 자의 ‘품격’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퍼포먼스 속에서 장애인은 인격체라기보다 ‘소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품격은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행동 방식이나 대우 속에서 완성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품격이 하나의 퍼포먼스라 한다면, 존엄은 상호작용에 가깝다. 품격은 위계 체계 속의 권위자에게 맞춰지는 연극이라면, 존엄은 인격체를 상호 존중하는 작용을 통해 완성되는 보편적 가치다.
현실적으로 장애인이나 소수자가 웬만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품격있는 대우를 받기 어렵다. 장애인들에게 더 실질적인 가치는 품격이 아니라 존중받는 느낌이다. 때문에 장애인을 배려가 아닌,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통해 장애인 등 소수자를 위로한다고 무심코 던진 언행에 당사자들은 상당히 불편해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비장애인을 닮으라’고 하는 건 폭력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행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켄지 요시노 뉴욕대 교수가 말하는 ‘커버링(Covering) 압력’이 사회에 존재함을 주장한다. 장애인에게 ‘티 내지 말라’는 시각이 엄연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는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당연한 듯 품고 있는 폭력이라 생각한다. 신체적, 정신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게 ‘정상인’의 행동을 최대한 닮으라고 교육하고, 티가 나지 않게 행동을 교정하라고 요구한다. 법치주의의 행동 규범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며 장애인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이들의 주장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장애인이 스스로의 삶을 수용하는 모습을 ‘정신승리’ 수준으로 보아선 안될 것이다. 저자가 지적했듯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의 『아Q정전』에서도 등장하는 정신승리법은 치열한 노력이나 성찰이 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이는 일방적으로 소통하는 품격주의와 닮아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우리는 당사자들의 생각을 철저히 배제한 채 우리 편의대로 규정하려는 경향도 있다. 김희경의 책 『이상한 정상가족』은 한국에서 편협한 가족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를 압축 성장속의 능력주의 확산과 함께, 국가가 능력부족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렸던 과거의 이력에 있음을 지적했다. 정상의 범주에서 멀어져 있으면 그것을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장애인의 신체적·정신적 장애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데도 말이다.
장애인의 권리는 ‘자유권’의 범주
때문에 장애인 자신은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삶의 태도로 승화시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잘못된 삶’을 장애인 스스로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철저히 자발적으로 선택할 범주이지, 국가나 집단이 강요할 부분은 아니다. 저자가 지적했듯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연결된 윤리적인 결단이다. 장애인은 자신의 삶을 정신승리를 통해 괜찮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결단을 통해 수용해야 하며 사회는 그들의 선택을 겸허하게 기다려줘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장애인을 둘러싼 우리의 법 현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서두에 소개한 김순석 씨의 죽음은 단순한 해프닝 수준에 머물렀을 뿐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러나 나비효과처럼 1990년대 특수교육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합리적 편의 제공’의 과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에서 ‘합리적 편의’라는 용어 대신 ‘정당한 편의’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장애인의 권리는 자유권의 범주로 한 등급 올라갔다. 저자의 바람대로 서로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한 존엄의 가치를 지향해 저속한 품격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이들의 ‘삶의 수용’을 존중하는 선순환을 통해 우리 사회 속에 사회 규범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우리의 이웃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전장연’ 시위, 해결책에 관심가져야
최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탑승 시위 때문에 시민들이 많이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불편하게 살아왔는데, 몇십분 늦는다고 이들이 법치주의의 틀을 깼다고 몰고가는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최근 국가의 품격을 운운하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품격주의는 법치주의와 종종 연결되기도 한다. 법치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법 규범을 준수해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밀은 동시에 오늘날 최고 권력자의 압제는 사라졌지만, 대신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존재할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장애인의 권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우리가 그들에게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다수의 횡포’로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소위 자신의 권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체성 정치로 몰고가기엔 장애인들은 스스로 권력과 기득권이 미약한 이들일 수 밖에 없다. 정치권은 오히려 왜 저들이 왜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나와 저런 투쟁을 벌여야 하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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