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협상은 이렇지 않다

사진= MBC뉴스 캡쳐
사진= MBC뉴스 캡쳐
  • 협상 결렬의 실체 이슬라마바드 협상은 공식적으로 결렬됐으나, 이란 대표단이 남아 중재자와 후속 논의를 이어갔고 양해각서(MOU) 직전까지 갔다는 점에서 ‘완전한 끝’이 아닌 ‘지연된 합의’에 가깝다.
  • 트럼프식 압박 전략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통항 제한과 이란의 전투 경계령은 전쟁 재개 신호라기보다, 다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상대의 카드를 무력화하려는 고도의 ‘흥정’ 과정이다.
  • 물밑 중재와 변수 중동 각국이 45일 추가 휴전과 2차 협상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등 협상의 동력은 여전하지만, 협상 주체가 통제하기 어려운 ‘레바논 전선’의 무력 충돌이 가장 위험한 변수로 남아 있다.

숫자를 보지 말고 사람을 보자

지난번 글에서 “(미국-이란 협상 결렬에 대해) 비관은 이르다”고 썼더니 댓글이 꽤 달렸다. “이제 진짜 전쟁 나는 거 아닌가요”부터 시작해서, 트럼프가 군함 15척을 들이밀었다고 링크를 보내온 사람도 있었다.

다들 숫자를 본다. 군함 몇 척, 유가 몇 달러, 협상 몇 시간.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 엄청나게 바쁘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실제로 어디까지 갔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미 협상단 대표인 JD 밴스 부통령이 기자회견을 끝내고 에어포스투 타고 떠났을 때, 이란 대표단은 안 떠났다. 그 자리에 남아서 몇 시간을 더 파키스탄 중재자들과 앉아 있었다. 협상을 먼저 끝내고 싶었던 쪽이 어딘지, 이 사실 하나가 말해준다.

이란 협상단의 압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테헤란으로 돌아가서 “이슬라마바드 MOU 서명 직전까지 갔다”고 썼다. 양해각서.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여러 사안에서 합의에 이르렀고, 두세개 핵심 쟁점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게 결렬인가, 아니면 거의 다 간 건가. 언론은 결렬이라고 썼다. 숫자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트럼프 ‘역봉쇄’는 ‘이란의 패’ 빼앗기

협상이 깨졌다고 한 다음 날,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하나는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들이민 것이다. 이란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에 대한 통항 제한 조치였다. 트럼프는 처음에 해협 전체를 막겠다고 했지만 미 중부사령부는 비(非)이란 항구를 오가는 선박은 통항을 허용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란 항구를 겨냥한 표적형 압박이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즉각 “죽음의 소용돌이가 될 것”이라고 맞받았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02달러를 일시적으로 넘어섰다. 언론은 이걸 ‘전쟁 재개’ 신호로 읽었다.

그런데 맥락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란의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는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이다. 전쟁 내내 그 카드를 쥐고 버텨왔다.

‘역봉쇄’는 그 카드를 무력화하려는 수(數)였다. 협상을 끝내겠다는 게 아니라, 다음 협상에서 이란이 들고 올 패를 미리 빼앗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같은 날 “이란이 먼저 연락해왔다, 합의를 원한다”고 했다. 봉쇄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대화 신호를 흘렸다. 트럼프식 흥정이다.

서아시아의 전화기는 불났다

다른 하나는, 같은 날 밤부터 관계자들의 전화기들이 불났다는 것이다.

이집트 외교장관이 위트코프 미국 중동특사와, 그리고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과 각각 통화했다. 터키도 양측 간극을 좁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CNN이 전했다. 아라그치 장관은 같은 날 사우디, 카타르 외교장관과도 통화했다. 파키스탄은 워싱턴과 테헤란 사이에서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다. 죽은 협상은 이렇게 안 돌아간다. 조용해진다.

물밑에선 더 구체적인 논의가 오간다. 45일 추가 휴전을 골자로 한 틀이 중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 CNN과 블룸버그가 후속 대면 협상 가능성을 전했고, 제네바와 이슬라마바드가 다시 협상장소 후보로 거론된다.

파키스탄 외교장관은 “가까운 시일 내에 새 대화를 촉진하겠다”고 밝혔다. 확정된 날짜는 없다. 하지만 2차 협상이 열릴 것이라는 보도가 솔솔 나오고 있다. JD 밴스가 떠나면서 “최종이자 최선의 제안을 두고 간다”고 했다.

이걸 결렬 선언으로 읽으면 절반만 보는 거다. 이란이 먼저 연락해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레바논이 변수다

왜 이슬라마바드에서 안 됐나, 그리고 앞으로 뭐가 문제인지.

핵 문제는 단순한 기간 싸움이 아니었다. 미국은 우라늄 농축 중단과 주요 시설 해체, 고농축 우라늄 반출을 요구했다. 이란은 농축 권리 인정, 제재 해제,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입장 차가 크다. 그 위에 신뢰 문제가 얹혀 있다.

이란 협상단 대표인 갈리바프 국회의장은 “두 차례의 이전 전쟁 경험 때문에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이란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 두 번 폭격을 당했다. 양보했다가 또 맞으면 정권이 끝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번에만 있는 변수가 하나 있다. ‘레바논’이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베긴 총리는 자기 군대를 자기가 통제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순간에도 레바논을 치고 있다.

이란이 선결 조건으로 내건 게 레바논 전선의 공습 중단인데, 그 전선의 행위자들이 이 협상 어디에도 없다. 미국과 이란이 합의문에 서명하려는 순간,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한 번 크게 치면, 이란은 테이블을 엎을 명분이 생긴다.

트럼프는 이란 항구 출입 선박에 대한 통항 제한을 밀어붙였고, 이란은 최고 전투 경계령을 발령했다. 겉으로는 전쟁 직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뒤에서 파키스탄, 터키, 이집트, 걸프 채널에서 문자와 전화가 오가고 있다. 45일 추가 휴전 논의가 오가고 있고, 2차 협상이 열린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어느 쪽도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보자.

이 글은 문병준 전 사우디대사대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문병준 전 주사우디대사대리

문병준은 외교부 중동 지역 업무를 중심으로 경력을 쌓은 외교관 출신이다. 주이집트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로 근무했으며, 과거 외교부 중동2과장을 역임했다. 2021년 6월 주두바이 대한민국 총영사로 부임해 교민 안전, 경제·문화 교류를 담당했고, 202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대사대리(Chargé d’affaires ad interim)로 공관장 직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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