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엄마들
[김미영의 7남매 홈스쿨링 일기] 홈스쿨 아니었으면 ‘웃음꽃 가족’ 됐을까 모두 사랑하고, 헌신하는 ‘7남매 모두 엄마’
제일 위인 큰 딸에게 홈스쿨링을 해서 좋았던 점이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큰 아이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뭔지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과 예쁘고 어린 동생들의 성장과정을 다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큰 딸은 동생들이 많은데도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 대학 전공으로 유아교육을 선택할 정도였다. 동생들이 많으면 귀찮고 벗어나고 싶을 법도 한데 아이들이 참 좋다며 입시가 끝나자마자 교회에서도 유아부교사로 봉사를 시작한 아이다.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에 학원에서 지쳐 집에 올 때도 어린 동생들이 뛰어나와 반기면 “모든 피로가 다 사라진다”며 동생들의 인사에 일일이 응대를 해주곤 했다.
주말에만 만나는 7남매 되지 않았을까
사실 아이들이 자라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다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인 나에게도 홈스쿨링이 준 가장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넷째를 중심으로 띠 동갑이 세 쌍이나 있는 우리 집에서, 만일 아이들이 다 학교를 다녔다면 많은 나이 차이 탓에 어린 동생들과 큰 언니들은 거의 ‘주말 형제’처럼 지냈을지도 모른다. 언니 오빠와 각각 7살, 5살 차이가 났던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잘 알지 못한다. 더구나 언니 오빠가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하숙하며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거의 남처럼 지냈다.
부모랑 아이들 모두 아홉명이 되는 식구들이 옹기종기 엉덩이를 붙여가며 매일 한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의 소소한 사건들을 반찬 삼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곧 넘치는 웃음이 밥상을 둘러 덮는다. TV가 없어도 어린 동생들의 돌발 행동과 말들은 매일같이 참신한 웃음보따리를 선물한다. 이렇게 가족 모두 같은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며 키운 깊은 유대감은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을 때에도 큰 힘과 용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엄마의 출산을 도운 아이들
모든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아이들은 반복되는 엄마의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도 함께 했다. 다섯째 아이를 품고 있을 때 양수가 미세하게 여러 번 샜다. 꼼짝없이 집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 엄마를 위해 아이들은 긴 휴가를 낸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할머니가 계시는 원주를 거점으로 영월을 오가며 영월 내에 있는 박물관 스물다섯 곳 중 십 여 곳의 박물관을 체험하고 수시로 강과 계곡을 휩쓸며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이 시간에 아이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기보다 오히려 그동안 소원했던 아빠와의 관계가 꽤 깊어지게 되었다.

다섯째가 태어났다. 예정일 보다 5주 일찍 세상에 나왔는데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신생아 중환자실로 직행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동생의 퇴원을 고대하는 남매들의 응원으로 아기는 기적처럼 회복되어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집에 왔다.
아이들의 환대는 대단했다. 특히 둘째의 애정은 각별해 공부할 때도 인형 같은 아기를 자기 다리와 팔에 기대어 놓고 책을 보고, 형제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도 아기를 팔에서 내려놓질 못했다. 큰 딸과 이제 다섯 살이 된 넷째까지 모두 ‘작은 엄마’들이 되었다. 기저귀도 능숙하게 갈고 이유식도 먹이며 이제는 엄마 아빠에게 데이트 시간도 준다. 아기를 돌보고 있을테니 밖에 나가서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오라고 우리를 등 떠밀어 내보내기도 했다.
경쟁관계에 있던 형제지간이 다섯째 아이를 놓고선 마치 부모자식 지간처럼 되었다. 넷째까지 있을 때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루하루 동생의 크는 과정을 신기해하고 동생의 재롱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웃음이 가득했다. 남편과 나에게도 다섯째부터는 자식이 아니라 마치 손주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유와 쓰담고만 싶은 사랑이 밀려왔다.
이어 여섯째를 품고 있을 때 나는 몸이 많이 힘들어 병원에 입원하거나 집에서 종종 많이 누워있었다. 그럴 때면 큰 아이들은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엄마를 위해 밥상을 차려 방으로 가져다주고 동생들 밥까지 차려 먹이곤 했다. 출산일을 앞에 둔 어느 날, 엄마인 내가 조리원에 있는 시간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 회의를 했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아빠가 출근을 해도 자기들끼리 잘 지낼 수 있으니 염려 말라며 나와 남편을 안심시켰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어떻게 살림을 하고 동생들을 돌볼지 계획을 세우고 시간표를 짰다.

돌봄이 필요한 동생들을 위해 첫째부터 셋째까지 같은 시간대에 다녔던 태권도 학원을 시간대를 달리해서 갈 계획을 세우고, 설거지며 잡다한 집안일에 관한 순번과 생활 규칙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여섯째가 태어났다. 조리원에서 돌아온 나는 기대이상으로 잘 정돈되고 깨끗한 집 상태에 너무나 놀랐다.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여섯째에게 분유를 먹이게 되자 아이들은 분유를 타는 일부터 먹이는 일까지 숙련된 솜씨로 능숙하게 해가며 나에게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이제 열세 살밖에 안 된 둘째가 띠동갑짜리 신생아 동생을 목욕시켰다. 젊은 엄마 못지않은 솜씨로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여섯째는 생후 5개월까지 나와 큰 딸 중 누가 엄마인지 구별을 못하는 듯 했다.

일곱째가 생겼을 때엔 나이가 들은 탓인지 나는 초기부터 몸이 너무 무겁기만 했다. 그런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아침이면 아이들은 익숙한 솜씨로 밥을 해서 동생들을 챙기고 잡다한 집안일도 당번을 만들어서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해나갔다. 이런 일이 훈련이 되어서일까 현재는 넷째까지 아주 훌륭한 살림꾼이 되었고 지금은 아래 동생들에게 나서서 정리 정돈 훈련을 시키고 있다.
방학이 무섭다고요? 20년을 그렇게...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 방학이 제일 무서운데 어떻게 1년 내내 애들 방학 같은 삶을 사냐”고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지 올해로 20년인데 아이들이 곁에서 힘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많은 자녀를 낳고 또 이렇게 웃음 가득한 집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엄마로서 성장하게 만들어 준 것도 아이들이고, 깨지기 쉬웠던 우리 부부사이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것도 아이들이었다. 항상 웃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도 아이들이 준 선물이었다.
아이들과 찰떡같이 붙어 살아온 세월과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어린 자녀와의 시간은 인생이 축복 그 자체임을 깨닫게 해준다. 함께 있는 일곱 명의 아이들이 언제가 헤어지는 날이 올 때, 아이들도 온 가족이 지지고 볶으며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이 인생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어른이 되어 힘든 시절이 올지라도 가족이 함께 했던 추억이 인생을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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