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집으로 오세요 “웰컴 홈”
[김미영의 7남매 홈스쿨링 일기] 처음 홈스쿨 때 아이들 ‘학습력’에 초점 친정 아버지 투병중 ‘가족의 가치’ 발견 사랑을 배려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홈스쿨 끝 사회 나가도 힘들면 ‘웰컴 홈!”
홈스쿨을 결심하다
큰 아이가 열 한 살이 되던 해, 당시 막내였던 넷째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 기저귀도 뗄 준비가 되어가자, ‘이제 홈스쿨을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새해 달력과 함께 항상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던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초등 4학년 나이에 3학년 수학부터 다시 시작하려니 마음만 바빠 1년 열두 달도 빡빡했다. 그래도 촘촘한 계획이 있어야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들을 앉혀놓고 각자에게 맞는 수학 1년 진도를 문제집의 페이지 수에 맞추어 계획성 있게 짰다.
그런데 한 달 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아이들의 외할아버지, 즉 나의 아버지가 후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지방 큰 병원에서조차 수술이 불가해 ‘원하면 서울로 가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후두암을 염증으로 잘못 진단해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한 탓에 처음 받은 단계가 ‘말기’ 진단이었다. 진단 후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해 연초에 서울 우리 집으로 올라왔다.
서울 큰 대학병원에서 수술이 끝난 후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병원을 드나들며 아이들 외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고, 몸이 약한 외할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셨다. 수술은 기대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성대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영구적으로 목소리를 잃게 될 상황이었으나 성대 없이도 성대 주변의 살을 울려 힘들지만은 아주 작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중단되다시피한 홈스쿨
그러나 퇴원 후에도 한 달 넘게 매일같이 방사선 치료와 함께 항암치료를 하는 어른을 돌봐 드려야했다. 가끔씩 아이들 외할머니가 당신의 집에 내려가실 때는 나는 아이들과 외할아버지를 혼자 감당해야했다. 그러다 외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시고 집으로 내려가셨는데 다시 급하게 연락이 왔다. 한 달 만에 쓰러지신 것이었다. 당뇨로 치솟는 혈당 때문에 잘 드시지 않아서 몸이 거의 뼈만 남은 상태로 영양실조가 왔다는 진단이었다.
다시 서울로 모시고 와서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오기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 외할아버지는 후두암 수술로 음식물을 넘기기 힘들었기에 아침마다 곱디곱게 간 죽을 만드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당뇨 때문에 음식재료에 아기 이유식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써야했고 산책도 시켜드려야 했다.
일으키기도 힘든 몸이었지만 아이들 외할아버지는 삶에 대한 의욕이 아주 강해서 아이들과 함께 종종 한강까지 걸으러 나가셨다. 세 살 막내보다도 훨씬 느린 할아버지에게 보조를 맞추어 걷고 쉬고 하다보면 반나절을 걸어도 닿기 어려운 거리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할아버지에게 신바람을 불어 넣으려는듯 앞장서 뛰어가다 다시 돌아오고, 또 가만히 있기 힘든 발을 연신 구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할아버지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아버지를 돌봐드리며 나는 힘들 때가 많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지내는 것이 참 신나보였다. 여느 때보다 더 많이 웃고 재잘거리는 통에 나도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졌고 웃을 일 없는 할머니의 입가에도 미소가 돌았다. 우울함의 적막 대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분명 투병중인 할아버지에게도 삶에 대한 의욕과 생기를 주었으리라.

참된 홈스쿨의 가치
한번은 매일 식사 때마다 할아버지가 식탁에 오시기 전 할아버지의 옆자리를 일찌감치 사수하는 큰 딸에게 ‘왜 할아버지 옆자리에 항상 먼저 와서 앉는지’를 물어보았다. 가래통을 옆에 놓고 연신 가래를 뱉어가며 식사를 하시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딸인 나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큰 아이가 말하길 “만일 할아버지가 먼저 오셨는데 동생들이 할아버지 옆에 안 앉으면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봐, 자기가 항상 먼저 와서 할아버지 옆자리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투병이 끝나고 할아버지가 매일 수학을 가르쳐 주실 때도 수술 탓에 목과 입에서 나는 냄새를 옆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도 큰 아이는 할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서 할아버지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나는 또 신기해서 조심스레 “할아버지 입에서 나는 냄새가 괜찮으냐”고 물었다. 딸은 “할아버지가 들이마실 때 같이 들이마시고 내쉴 때 같이 내쉬면 돼요”라고 답했다.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그때까지도 홈스쿨링에 많은 부담과 무게를 갖고 있던 나에게 ‘홈스쿨이란, 가족이 그저 서로 사랑하며 가족답게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계기가 됐다. 1년 동안 아이들은 학습적인 공부는 하지 못했고 1년치 달력에 그려놓았던 촘촘한 수학 페이지 수도 공들여 끄적댄 낙서처럼 되어 버렸지만,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배려’라는 것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또 아무리 힘든 투병의 그늘도 가족이라는 사랑의 따뜻한 울타리를 넘보지 못한다는 것을 함께 배우게 됐다.
할머니 할아버지 키를 훌쩍 넘어 커버린 아이들은 지금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끔찍이 아끼고 위한다. 나도 어색해서 하지 못하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입에 달고 있다.

언제든 집으로 오세요^^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뭘 잘하거나 못하는 것 때문에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였고, 아이들의 학습력이 ‘홈스쿨의 열매’인 양 착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홈스쿨링을 함께 한 엄마들과 십대 후반 아이들 문제의 고민을 나눌 때, 우리는 어떤 가정을 만들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졌던 ‘공부 잘하는 것’에 대한 염려 역시 얼마나 쓸 데 없는 고민들이었는지...
아이들이 커갈수록 우리 홈스쿨 엄마들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집이,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고, 언제든 돌아오고 싶고, 또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집인가?’를 생각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키웠더라도 진로를 찾아 집을 떠난 아이들이 밟게된 세상엔 홈스쿨 상황들과는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이 많이 있었다. 대학에 가면 홈스쿨을 졸업할 것 같았지만 세상으로 나간 아이들에게 돌아오고픈 따뜻한 집은 더 필요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은 졸업이 없다. 세상의 어떤 겨울도 녹일 수 있는 가족, 그리고 가족이 함께 만들어가는 봄날의 햇살 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홈스쿨링’이었음을, 오랜시간 홈스쿨링을 함께한 우리 엄마들이 굳이 말이 없어도 함께 느끼는 고백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살을 내어주는 눈물의 기도가 이 울타리를 만드는 재료였음을 서로가 잘 알기에 손만 잡아도 눈빛만 나눠도 서로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남편과 나는 홈스쿨을 통해 이루고 싶은 소망을, 그리고 우리 집이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벽에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Welcome home”
우리 부부가 홈스쿨을 통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자 우리 자녀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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