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와 언론으로부터의 자유
[이명재의 절문(切問)] 최악의 한국언론, 어떻게 바꿀것인가
두 개의 나라, 두 개의 시대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으며,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두 도시 이야기’의 저 유명한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디킨스는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두 도시, 런던과 파리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모순이 극대화되는 19세기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두 도시’를 ‘두 나라’로 바꿔 이를 한국 사회에 대입해 보자. 한국에는 두 개의 나라, 두 개의 시대가 있다. 최고의 나라와 최악의 나라이며 최고의 시절이면서 최악의 시절이다. 한편에는 당당히 선진국으로 진입해 있는 국제적 위상, 세계 최고의 제품들을 생산해내는 경제에서의 도약, 촛불혁명으로 과시한 민주주의의 모범이 있다. 예술과 문화에서의 빛나는 성취는 또 어떤가. 영화와 드라마에 의한 한류의 기세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또 세계 유수의 영화제와 기악 콩쿠르에서 한국의 배우와 감독과 연주자들이 우승을 차지했다는 낭보들의 연속까지, 이 모든 것은 분명 최고의 나라로서의 한국이다. 그러나 그 최고의 선진과 성취의 이면에는 최악의 나라와 최악의 시절이 있다. 세계 1류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의 3류적 지배구조,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비정의 정글사회,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기형적 검찰제도가 드러내는 공권력의 부패와 타락상.

현실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한국 언론
현대의 첨단으로 앞서는가 하면 ‘전(前)근대’의 후진에 머물러 있는 나라, 그 이중적인 나라, 모순적인 시대의 공존이 지금 한국의 한 초상이다. 그리고 그 후진과 최악의 단면이 다른 어느 곳보다 집약돼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의 언론이다. 한국의 언론의 다수가 매일같이, 아니 매순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가끔 사실을 말하고, 자주 사실을 제조하며, 언제나 사실을 가공하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이름의 이들 비(非)언론, 반(反)언론은 현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생산’하고 ‘제조’한다. 실재의 현실을 밀어내고, 그 밀려난 현실의 자리를 자신들이 제조한 현실, 가공의 현실, 변형된 현실로 채우려 한다.
한국 언론의 후진성은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조사하는 신뢰도 지수에서 46개 국중 몇 년째의 확고한 최하위에서 40위니, 38위니로 상승한 것을 선전(善戰)했다는 위안으로 삼아야 할 정도다.
출범한 지 두 달도 안 되는 동안 납득할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서 기이한 행태를 보이는 새 정부,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스스로 탓할 정도로 해괴한 행태를 보이는 집권 세력에 대해 쏟아내는 낯뜨거운 보도들은 권력과 언론 간의 유착을 넘어 ‘권언(勸言)의 일체화’라고 해야 할 정도이거니와 이런 언론에게 언론의 자유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 언론의 중심지인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에 우뚝 서 있는 ‘언론자유 조형물’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언론인들과 단체들이 뜻을 모아, 돈을 모아 세운 ‘굽히지 않는 펜’이라는 이름의 이 조형물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그 조형물을 향해 이렇게 묻는 듯하다. 한국의 언론에게 자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언론은 과연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무책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언론, 그 언론의 자유는 다른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로서의 언론자유가 아닌, 다른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독선과 전횡의 자유, 반(反) 자유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언론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
로이터 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하나의 뚜렷한 양상은 뉴스기피 현상이다. 그것이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새로운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때 한국의 언론은 사람으로서의 본성까지 바꾸는 마법을 부리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음식을 끊듯 뉴스를 금식하고 있다. 언론을 거부하려 하고 언론보도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나는 이들을 ‘양심적 언론거부자’로 부르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언론으로부터 끝내 숨을 수는 없다. 피할 데도 없다. 우리가 그림자를 떼어놓을 수 없듯 뉴스와 언론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기어코 따라오고야 만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는 결코 도피나 거부로부터 얻을 수 없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는 언론으로부터 피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언론을 언론으로 제 자리로 돌려놓을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언론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길
지난달 초 민예총 전시회에서의 기자 실명 비판이 기자단체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산 것은 한국의 언론이 비판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비판을 받는 것에는 얼마나 거부반응을 보이는지를 보여줬다. 그것은 한국 언론의 현실과 함께 그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전시회의 내용에 대한 동의와 지지 여부를 떠나 그 논란과 공방은 역설적으로 언론에 대한 언론 수용자, 시민사회의 비평이 더욱 가열해져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케 해줬다. 책임 있는 언론이 책임 있는 독자를 만들며, 책임 있는 독자가 책임 있는 언론을 만든다.
‘언론의 언론화’는 ‘독자의 독자화’, ‘독자의 언론화’로써 비로소 이뤄진다. 언론 밖의 언론인 수용자와 시민들이 언론 위의 언론으로서 자신이 또한 언론임을 자각할 때, 자신이 가진 힘을 행사할 때, 그때 비로소 언론은 진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언론의 자유도,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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