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의 정치 진출, 2중의 해악인 진짜 이유

[이명재의 절문(切問)] 언론인 정치·권력 진출과 참여의 진짜 문제 어떤 언론인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의 문제

강인선 대통령실 대변인은 조선일보 부국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외신대변인으로 직행해 폴리널리스트 논란의 당사자가 됐다. 사진= 연합뉴스
강인선 대통령실 대변인은 조선일보 부국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외신대변인으로 직행해 폴리널리스트 논란의 당사자가 됐다. 사진= 연합뉴스

현직 기자들의 정치권, 집권 권력으로의 직행에 대해 이른바 ‘폴리널리스트’ 논란이 또 일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이어 지방선거가 잇달아 치러진 선거의 계절, 적잖은 언론인들이 주요 정당과 후보들의 캠프에 몸을 담았고, 권력 교체 이후엔 상당수의 언론 출신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는 것은 현실에서 낯익은 풍경이다. 이 같은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에 대해서는, 특히 며칠 전까지 기자로 일했던 이들의 정치권 진출에 대해서는 거의 비난 일색이다. 특히 언론계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언론계는 물론이고-의 논의가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더욱 적확히 말하자면 다양하게 보다는 더욱 깊게, 본질적인 면에서, 무엇보다 실상에 입각해서 다뤄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사실 언론의 정치 참여를 백안시하기보다는 그것이 ‘제대로 된’ 진출이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현상이라고 본다. 정치와 언론은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인 문제에 대해 올바른 공론장을 형성하고 최적의 해법을 도출해내는 일을 그 업의 지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많은 영역이다.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치’의 기능을 생각할 때 좋은 인적 자원이 매우 부족한 정치권에 유능한 인재들이 진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런 자원들의 원천 중 하나로 언론 현장에서 공공적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훈련을 쌓은 기자 출신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의 정치 진출은, 그것이 일정한 규율과 양식의 바탕에서 이뤄진다면,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정치적 입장의 노출이 아닌 은닉이 진짜 문제

그러나 바로 거기에 지금 우리 언론인의 정치진출의 부끄러운 현실이 있다. 언론인의 정치진출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 위한 필수의 전제, 그것은 언론이 언론을 통해 해내려고 했던 권력에 대한 감시자, 권력의 견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제에 설 때이다. 언론에서 일할 때 그래야 하고, 정치로 이전해서 또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이 문제는 언론에서 ‘어떤 언론인’이었느냐의 문제인 것이고, 그 어떤 언론인이냐가 정치와 권력에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이냐를 결정짓는 것이다. 어떤 언론인이었느냐에서 정치권 진출의 출발과 결과가 사실상 예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언론이었느냐는 것에서부터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 언론의 정치와의 관계에서 진짜 문제가 놓여 있다. 상당수 유력 언론의 정치와의 관계에서의 문제는 정치적 입장을 밝힘으로써 이른바 ‘엄정중립’을 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 중립의 표방 뒤에 실은 누구보다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는 것에 있다. 문제는 정치적 입장의 표출보다는 정치적 입장의 ‘은닉’에 있는 것이다. 상당수 유력 매체의 중견 언론인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은 겉으로의 중립, 그러나 실제에서는 편향을 넘어 정치세력과의 일체화라고 해야 할 정도의 모습이다. ‘음성적인 정치인’, ‘지면 밑의 정치인’, 그것이야말로 진짜 문제인 것이다.

정치 진출이라기보다는 권력에 의한 포상

며칠 전 ‘민심역행 점입가경… 윤핵관도, 이준석도 모두 퇴장해야’라는 제목의 어느 유력지의 칼럼은 집권세력에 대해 애정과 충심으로 호소하고 있다. “여당에 바라는 것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총선과 다음 대선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 달라는 것”이라고, “자칫 좌파에 정권을 헌납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헤아려 달라고 한다. 이런 노골, 그 노골성을 ‘국민’이라는 ‘중립’의 옷을 입혀 포장하고 있지만 이런 간곡한 애정과 호소가 ‘언론’의 이름으로 발설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보이고 있는 언론 출신의 권력에의 이전은, ‘진출’이니 ‘영입’이라기보다는 위와 같은 류의 공(功)과 애정에 대한 ‘포상’에 가깝다. 언론사 안에서의 정치에서 언론사 밖의 정치로 옮기는 것, 같은 몸에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애써 얼굴을 가려왔던 언론의 탈을 벗고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 같은 포상으로서의 권력 참여는 언론 자신과 정치에 대한 2중의 해악이다. 포상을 받아 권력에 안기는 이들이 정치를 선도하고 견인할 수는 없다. 영합과 퇴행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소금의 역할이 아니라 악취를 덮어주는 향신료가 될 뿐이다.

언론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로

권력에 안기는 불나방 같은 영합으로서의 정치 진출의 또 한편에 언론인 출신 정치인들이 드러내는 문제는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치열성에 있다. 정치에 진출해 지도자의 위상에까지 오른 언론인들이 적잖지만 그들의 한계는 무엇보다 깊이에서 얕고, 폭에서 좁으며, 본질과 말단의 분별에서 근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 일천함과 협소함은 무엇보다 그들이 자신이 속하는 사회를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정면 직시해 본 적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일천과 협소, 치열함의 결여는 기자 경험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결국 많은 경우 언론인의 정치 진출이 이르게 되는 곳은- 정치를 좋은 의미의 정치라고 할 때- 기자의 정치화가 아닌 정치의 기자화가 돼버리는 것이다. 언론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로 돼 버리는 것이다. 기자로서 뛰어났던 이가, 그러나 기자로서 뛰어났다는 그 점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정치인이 못되고 있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거기에 있다, 는 것을 우리는 적잖게 보고 있다.

언론인의 정치진출, 결국 그것은 정치 이전에 ‘어떤 언론’이냐에 대해 묻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금 문제는 언론이다.

글쓴이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명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 국가인권위원회 법제개선담당관, 뉴스통신진흥회 사무국장 등으로 근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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