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의 최대 피해자는 尹

[이명재의 절문(切問)] 최고권력자 보호하려다 오히려 망치는 유력매체들

대선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이 신문을 펼쳐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대선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이 신문을 펼쳐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한계를 정해 놓고 행하는 비판을 비판이랄 수는 없다. 그 한도치 내의 ‘안전지역’에 머물며 가하는 비판은, 실은 비판이라는 이름의 반(反)비판이며 오히려 비판을 가장한 옹호다. 게다가 그 비판이 결국 자기 자신들의 이득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비판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지금 유력 매체들의 최고권력자와 그 주변세력에 대한 ‘쓴소리’들이 이를 보여준다.

지난주에 모 유력 일간지의 한 칼럼을 놓고 “이 신문에서 모처럼 보는 괜찮은 칼럼”이라며 누군가 대화방에 글을 올려 놓았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찬양가를 줄기차게 싣던 이 매체에서 이런 질타를 싣다니, 이채로웠던 듯하다. 평일 낮에 서울 시내의 해장국집에 간 것을 놓고 ‘尹은 꼭 무교동 북어국집에 가야 했을까’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칼럼은 “북어국집에서 새삼 30%대가 무너진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버랩됐다”면서 그에 대해 “정치적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대선 전 민심은 ‘검찰총장 윤석열’을 뽑았더라도 지금은 대통령다운(presidential) 모습으로 진화하길 기대한다”고 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집무실로 출근하는 중 질문하는 기자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집무실로 출근하는 중 질문하는 기자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계치를 정해 놓고 가하는 권력비판

그러나 내겐 이것이 비판보다는 걱정의 발로로 읽혔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걱정-, 그리고 그 권력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들의 장래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걱정이 보였다. 질타라기보다는 애소(哀訴)이며, 제발 이러시면 안 된다는, 통촉(洞燭)을 호소하는 간언으로 읽혔다.

이 매체는 며칠 뒤 하나의 사진을 실어 정국을 요동치게 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징계를 받고 직무정지된 여당 대표에 대해 대통령이 당의 직무대행에게 은밀하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카메라가 포착한 것인데, 이 문자 메시지에 담긴 내용과 표현의 천박함이나 치졸함도 놀랍지만 그러나 더욱 놀란 게 있었다. 사진을 실은 기자를 인터뷰한 것이 미디어 비평지에 실렸는데, 그 기자는 “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했고, “공개할지 말지 고민이었다”라고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단독, 특종에 맹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전쟁판에서 ‘대특종’이랄 수도 있는 이 사진을 ‘감당할 수 있을까’, 라니.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동안 ‘감당이 안 되었던’, 그래서 싣지 않았던 기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대통령 부인의 논문 표절 조사 결과에 대한 보도가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표절’이라는 말조차 과분할 정도로 너무도 명백한 사안이어서 몇 달씩이나 걸릴 일도 아니었지만 거의 1년 가까이 대학의 엄선된 교수들이 조사해 내놓은 결과는 분노를 넘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국민대의 “김건희 씨 논문표절 아니다”는 발표에 대해 유력 매체들은 아예 기사를 내지 않았거나 사회면 하단에 1단으로 처리했다. “과거 신정아, 문대성 등등의 논문표절에 대해 며칠동안 1면을 포함 주요 면을 털어 이 불공정에 대해 대서특필했던 주요 언론이 일제히 입을 닫는 모습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고 어느 후배는 개탄을 했거니와 40면이 넘는 지면에 이 뉴스를 실을 한 귀퉁이가 없었다는 것, 이것이 이들 유력매체들의 지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최대 수혜자 아닌 최대 피해자

위의 ‘북어국집’ 칼럼은 쓴소리를 하면서도 기어이 안타까움과 애정을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의 공감능력 부족은) 아무래도 정치 입문 전 직업과 무관치 않다. 판사 검사 장차관 장성…. 갑(甲)의 위치에 있다 보니 상대방 반응에 눈치 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정치한다고 체질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각별한 이해심을 보여줬다.

이 유력 매체들은 그런 애정과 이해와 한줌의 조심스런 비판이 그 권력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 권력자는 최대의 수혜자가 돼 왔다. 그러나 그런 의도와 바람은 결국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함정이 될 것이다.

유력 매체들은 그동안 숱한 왜곡과 편향으로써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 왔다. 직접적인 보도 피해자들도 적잖지만 더 큰 것은 여론 공론장을 왜곡함으로써 많은 간접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들이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이들이 있다. 자신들과 동맹, 기득권 카르텔에 속한 이들이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애정과 옹호가 바로 그 정점이며 구심점이다. 지난 대선 때 특히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이들 유력 매체들의 행태가 보여준 건 불공정이나 왜곡을 넘어선 수준의 정치적 편향, 편향을 넘어 정치세력과의 일체화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의도가 낳는 역설이 있다. 때로는 뭔가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그 대상을 피해자로 만든다는 역설이다. 지금 대통령에 대한 이들 매체의 보도가 그렇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 지금은 ‘권력과의 신혼’에 취해, 게다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듯한 작취(昨醉)가 미성(未醒)인 상태에서 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가 지금의 단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감당 불능의 곤경과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겪을 불안과 두려움을 상상해 보라. 자신보다 9년 전에 그 권좌에 앉았던 어떤 여성, 한때는 대통령으로 불리웠지만 영어의 몸을 거쳐 가련한 처지에 놓인 그 여성이 겪었을 공황에 빠질지 모른다. 그 여성이 유력 매체의 결사적인 옹위와 비호와 대변에 의해 최고권좌에 올랐으나 그 고공(高空)의 현기증에 무너져 결국 언론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가 됐던 그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언론의 무능 아니면 파렴치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 예견하지 못했다면 지적 무능이며, 알고도 벌인 일이라면 무모 파렴치한 일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자를 보호하는 유력 언론들, 그러나 그 보호는 오히려 그 권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엔 언론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을 보호하려다 스스로를 망치는 자해극인 것이다.

글쓴이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명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 국가인권위원회 법제개선담당관, 뉴스통신진흥회 사무국장 등으로 근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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