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는 언론 참사다

[이명재의 절문(切問) 정부의 무능과 실종이 첫 참사 언론의 왜곡과 호도가 두 번째 참사

제주도청 별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제주도 공무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제주도청 별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제주도 공무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는 두 번 일어났다. 29일 밤 이태원 골목에서 첫 번째 참사가 일어났고, 다음날부터 신문의 지면과 방송에서 두 번째 참사가 일어났다.

첫번째는 정부의 무능에 의한 죽음이었다면 두번째는 언론에 의한 왜곡과 호도의 타살이었다. 정부와 언론에 의한 합작의 참사였다. 정부는 죽음을 방치했고 언론은 죽음을 모독했다.

언론은 희생자들의 눈물과 비명 대신 대통령의 지시, 지시랄 것도 없는 공허한 지시를 중계하느라 바빴다. 이태원 참사의 진짜 원인은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 젊음을 표출하러 모인 청춘들의 운집이나 “내려가!”하는 다급한 외침이 아니라 정부와 최고권력자의 무능과 부실, 그런 정부와 대통령을 보호하려 한 언론이었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이 직면한 진짜 불안과 공포는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의 골목길이 아니라 그런 정부, 그런 언론이 이 사회를 이끌고 있다는 것, 우리가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희생자 대신 대통령 ‘동정’ 중계한 언론

이 사건의 원인은 앞으로 파헤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너무나 명백한 것은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것이고, 막아야 했던 사고였다는 것이다. 누가 막지 못했는가. 5년 전 같은 장소의 장면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5년 전인 2017년 엄청난 인파가 몰린 같은 장소에서의 핼로윈 축제 때 서울시가 교통을 통제하고 일방통행으로 동선을 유도했던 것이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어느 방송은 참사 직후 이를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했다. 이것이 왜 한국사회의 문제인가. 어느 신문의 논설위원은 “경찰을 더 배치했어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라고 한 행안부 장관의 발언을 질타하면서 엉뚱하게도 일본의 경우를 끌어온다. “일본에선 민간행사 날도 대규모 인파가 몰리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찰의 유도차와 ‘디제이 폴리스’를 배치한다.” 일본으로부터 배우자는 것인데, 그러나 이게 왜 일본으로부터 배울 일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미 5년 전에 보였던 모습이다. 한국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5년 전과 다른, 아니 바로 작년에서 뒤로 돌아간 2022년 10월의 한국의 문제, 서울의 문제인 것이다. 지난 1년 새, 몇달 새 달라진 그 무엇이 문제인 것이다.

방송과 신문들은 대통령의 긴급지시를 중계했다. 대통령이 밤새 긴급 대응한 것으로 그 말 한마디 숨결 한올까지 속보로 전했다. ‘가용가능한 자원을 총동원해 지원하라’, ‘현장에 구조요원을 제외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시키라’는 등의 지시를 속보로 내보냈다. 긴급지시라고도 할 수 없는 ‘동정’이라고 해야 할 공허한 지시들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사고 현장에 와서는 “여기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고 묻는 이를 과연 간밤에 밤새 보고를 받고 지시한 이가 맞느냐고 따지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수재 때 모녀가 죽음을 당한 반지하실을 찾았을 때 보였던 관광객이나 구경꾼 같은 모습의 최고권력자를 질타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임시 벽 담장이 참사의 원인이었다는 식의 유력 신문사의 1면 머릿기사는 아연실색케 했다. 그 다음에는 골목의 내리막길에 죄가 있다고 물을 셈인가.

그런가하면 어느 매체는 참사의 원인을 서울 인구 과밀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린다. “이태원 참사 이후 일상생활에서 ‘압사 위험’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서울의 과밀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과밀해서 서울 시민들은 언제고 압사당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살아 왔다는 말인가. 60년 전 작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는 소설을 썼을 때부터 서울은 늘 만원이었고 과밀이었다. 그러나 이 신문은 “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만원 지하철이나 각종 축제 현장 등 가는 곳마다 인구밀집도가 높은 한국 특유의 ‘과밀 문화’를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면서 “시민들은 또 다른 참사를 막으려면 이 같은 문화에 자성이 필요하다며 각자 일상에서 마주했던 과밀에 대한 기억을 꺼내고 있다”고 난데없이 시민들이 자성할 것을 촉구한다. 어느 공영방송은 ‘누가 먼저 밀었느냐’는 식의 경찰의 책임전가 의도를 질타하기는커녕 ‘범인’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11번의 반성 필요한 언론

경찰이 사전에 신고 전화를 11번이나 묵살했다는 사실을 일제히 보도하는 2일자 신문들의 1면 머릿기사 제목에는 거센 분노와 질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지난 봄,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 선거 때 11번의 무시 정도가 아닌 100번, 1000번의 위험신호와 경고를 무시했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반성 한마디 없이 국가애도기간을 행정명령 내리듯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집권 권력자와 그 세력들이 더욱 무례 무도해지고 있는 것은 누구의 비호 때문인가.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기어이 바꾸고야 마는, 무례하다 못해 해괴한 이들의 행태는 누구로부터 응원과 표창을 받은 결과이겠는가.

우리의 언론에 지금 필요한 건 11번의 반성이다.

글쓴이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명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 국가인권위원회 법제개선담당관, 뉴스통신진흥회 사무국장 등으로 근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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