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잃어버린 기자

[이명재의 절문(切問)] 기자는 쓰는 자 이전에 질문하는 자 그러나 질문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나토정상회담 참석차 스페인으로 향한 공군1호기에서 윤석열, 김건희 대통령 부부가 인사를 하자, 기자들이 환호하는 탄성이 여기저기 터졌다. 사진=YTN 방송 캡쳐
나토정상회담 참석차 스페인으로 향한 공군1호기에서 윤석열, 김건희 대통령 부부가 인사를 하자, 기자들이 환호하는 탄성이 여기저기 터졌다. 사진=YTN 방송 캡쳐

기자(記者)는 ‘쓰는 자’, 라는 말이다. 19세기 말 서구형 근대 언론 제도와 형식이 갖춰지면서 이 말 역시 일본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라고 하는 말은 사실 기자의 일 전체를 온전히 담고 있지 못하다. 그 일의 한 부분, 특히 마지막 공정에서 이뤄지는 작업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뭔가를 쓴다는 것은 그 전에 뭔가 쓸 것이 있다는 것이며, 그 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 먼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있어야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뭔가를 보고 듣고 수집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의 일은 여러 측면에서의 정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는 일, 듣는 일, 모으는 일, 판단하는 일,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비로소 기자의 일이 될 것이다. 그중 기자의 일의 출발이자 몸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질문하는 것일 듯하다. 뭔가를 물어보고 따져보고 의문을 던지는 것. 어떤 것에 대해 기자가 질문을 던질 때, 그럴 때 비로소 기자의 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또한 물어보는 이, ‘문자(問者)’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부터 돼야 하는 것이다. 기자의 일의 성패는 잘 물어보는 것, 제대로 물어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기자가 속한 사회는 기자에게, 언론에게 물어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대신 환호성 지르는 기자들

언론비평 매체인 미디어오늘에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난달 27일 나토 정상회의에 가는 대통령이 비행기 안에서 취재진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신의 부인을 소개했는데, 그녀의 등장에 취재진 사이에서 ‘와우’ ‘오오’ 라는 소리가 나왔다. 대통령은 부인에게 “한 말씀 하시라”고 했지만 별다른 답이 없자 취재진은 “비행 어떠셨나요? 여사님”이라고 물었다. 갖은 물의와 의혹을 빚고 있는 인물을 눈앞에서 만났을 때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일성은 그 의혹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인기 여배우의 등장에 환호하는 듯한 탄성이었다.

기자들의 환호가 터져나온 또 다른 장면이 있었다. 7월11일 대통령실이 코로나 재확산을 이유로 출근길 대통령의 질의응답(이른바 도어스테핑)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한 다음날 대통령이 출근길에서 “뭐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요”라고 말하자 취재진은 “오!”라고 환호했다. 한 기자는 “대통령님 내일도 하실 거에요?”라고 물었다. 이 매체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상 하루 만에 대통령 출근길 질의응답 입장이 번복된 사유를 묻는 질문은 없었다.

이 두 장면이 대통령과 기자 간에 오가는 문답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한 단면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권력자를 상대하는 일이기에 각사마다 회사를 대표하는 데 모자람이 없는 정예들로 선발되었을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이 대통령을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국의 언론이 최고권력과 최일선에서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풍경을 만날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부끄러움은 그러나 그 행위자가 아니라 보는 자들의 몫이 돼 버린다.

우리는 지금은 대통령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이 최고권좌에 있었던 시절, ‘질문을 받지 않는 대통령’을 내내 봐야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과의 간담회는 담화 발표회나 낭독회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질문을 받지 않는 대통령은 ‘질문하지 않는 기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G20 정상회의 때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겠다고 질문해 달라고 거듭 요청해도 우리 기자들이 끝내 손을 들지 않던 모습은 그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장면이었다.

2013년 3월 7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ㆍ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13년 3월 7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ㆍ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질문을 잃어버린 언론, 질문폭주의 언론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 언론. 그러나 한국 언론에 질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때로는 파상적인 질문의 융단폭격을 가한다. 우리는 몇 년 전 장관 후보자와 가족들을 상대로 한 한국언론의 수천, 수만 개의 질문들을 기억한다. 그것은 언론의 이름으로 가해진 한 가족에 대한 망치질이었고, 난도질이었다.

질문을 잃어버린 언론과 질문의 폭주를 벌이는 언론, 그 질문의 결핍과 난무에 한국 언론의 한 현실이 있다.

좋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있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다. 그러나 이 말로는 부족하다. 많은 경우 질문은 그 자체가 답인 것이다. 질문이 질문답게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사안에 대한 정보와 지식, 그 정보와 지식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건 어떤 사안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문에 반드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필수적인 것이 있다. 그건 질문을 던지는 기자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는 것, 이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이냐를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다. 질문의 질문됨을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 문자(問者)의 문자(問者)됨을, 기자의 기자됨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질문다운 질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자윤리강령 제 1조 ‘언론자유 수호’ 조항은 ‘권력과 금력 등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내·외부의 개인 또는 집단의 어떤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도 단호히 배격한다’고 돼 있다. ‘독립성’을 천명한 이 조항에는 그러나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권력과 금력으로부터의 자유 못잖게 또 다른 자유, 즉 기자의 무지와 편견, 독선으로부터의 자유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기자들의 질문을 보면서, 그들이 가져야 할 부끄러움을 대신 떠맡아야 하는 시민들은 기자들에게 묻는다. 진짜 질문을 잃어버린 언론에 시민들은 묻는다. 당신들은 과연 자신의 무지로부터 독립돼 있는가, 라고.

글쓴이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명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 국가인권위원회 법제개선담당관, 뉴스통신진흥회 사무국장 등으로 근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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