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의 중립 아닌 중립

[이명재의 절문(切問)] 언론 최고의 덕목이지만 가장 오염된 말 ‘중립’이라며 중립에 반하는 행태를 규탄한다

사안의 본질을 파고 들려는 노력없이 서로 맞서있는 양측 주장을 중계하는 식은 중립을 지키는 언론 보도 태도가 아니다.
사안의 본질을 파고 들려는 노력없이 서로 맞서있는 양측 주장을 중계하는 식은 중립을 지키는 언론 보도 태도가 아니다.

한국의 언론에서 특히 남용되는 말들. 그러나 그만큼 오해되는 말들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로 ‘중립’을 빼놓을 수 없다. 언론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자 규범이라고 해야 할 ‘중립(中立)’은, 그러나 교조주의에 빠지는 신념과 교리가 대개 그렇듯 가장 오염되고 천박한 수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말이 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중간이거나 균형, 절충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중립에 대한 언론의 가장 흔한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중립이건 중도(中道)이건 진정한 ‘중(中)’은 사실 진보이기도 하고 보수이기도 하다. 아니 진짜 진보, 진짜 보수라면 중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가 진정한 보수가 되기 위해서는 ‘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보가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중도가 돼야 한다. 보수의 보수화를 위해서도, 진보의 진보화가 되기 위해서도 중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정의라고 할 <중용(中庸)>의 첫 대목이 밝히듯 ‘중(中)’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아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中者 不偏不倚 無過不及之名)’이라고 할 때, 중이냐 아니냐, 중도냐 아니냐는 수평적 공간적 균형이 아니라 그 ‘깊이’와 ‘크기’에 있는 것이다. 왼편이냐 오른편이냐가 아니라 얕으냐 깊으냐, 좁으냐 넓으냐, 단편이냐 포괄이냐에 있는 것이다.

중립에 대한 표피적 이해, 양비론

중립이 표피적으로 이해될 때 흔히 빠지는 것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의 함정이다. 그것은 중립에 대한 얕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양비론의 위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 유혹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양비론을 취하는 것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문제의 본질, 주장의 적부(適否)에 대해 파고 들려는 노력 없이 서로 맞서 있는 양측의 주장을 중계하고는 양쪽이 다 그르다니, 양측이 다 문제다니 하는 식으로 꾸짖고는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양비론을 펼치는 언론을 질타하고 넘어서야 할 언론들에서도 양비론이 넘쳐난다. 요 며칠 새 보게 된 몇몇 기사들에서 양비론 횡행의 현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예컨대 KBS에 대한 감사를 ‘표적 감사’ 논란으로 전하는 미디어 비평 매체는 이 사태를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의 일로 규정한다. 감사원장이 “감사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는 망언을, 그것도 기관을 대표해 국회에 출석해 발언하는 자리에서 서슴치 않고 내뱉는 감사원이 벌이고 있는 일련의 행태에 대해 “감사원의 행보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논란을 빚고 있다“고 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레 있는 일쯤으로 정리하고 만다.

기계적 중립을 깨겠다고 나선,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매체에 실린 칼럼은 여당의 폭주와 무능을 비판하다가 “야당은 어떤가”라고 느닷없이 물줄기를 돌린다. 여론조사 수치를 빌려 “정부 여당에 견줘 나을 게 별로 없다”고 양비론을 편다. 상대보다 나을 게 별로 없는 여야가 민생을 위해 건설적인 경쟁을 벌인다며 예로 드는 입법안이 종합부동산세 완화법이니 법인세 완화법이니 등의, 오히려 대다수 국민들의 민생을 해칠 입법안을 민생법안으로 들고 있다. 양비론을 펼치다 보니 궁색한 근거로 빠져들고 있다. 이 칼럼은 여야의 대립을 정치권의 ‘무한대결’로, 그런 것이 정치 혐오와 냉소를 키운다고 했지만 이런 식의 보도야말로 냉소와 혐오를 키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기계적 중립만이라도’가 언론에 요구하는 최대치가 돼 버린 현실, 유력 언론들에게 바라는 것의 최대치가 기계적 중립이 돼 버린 한국언론의 현실에서 이 정도의 중립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 신문에 기대하는 ‘진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자족하는 것인가. 안이하고 나태한 인식이며 시각이다.

양비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진보언론

미국의 양심적인 실천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책에서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중립은 사실 현실과의 대면으로부터의 도피, 문제의 핵심으로부터의 회피를 지적한 것이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는 말, 실은 신곡에 나오지는 않는 이 말은 그럼에도 중립 아닌 중립, 중립의 이름으로 중립에 반하는 이들에 대한 강한 규탄이 들어 있다. 한국의 언론들, 특히 언론에 대한 언론, 한국의 언론을 바꾸겠다는 언론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다.

글쓴이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명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 국가인권위원회 법제개선담당관, 뉴스통신진흥회 사무국장 등으로 근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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