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 이름의 유래와 한글 창제의 비밀①
‘기역’ 등은 ‘발음기호’였다 세종의 맞춤법, 450년 앞서
자음 이름의 유래가 된 책으로 《훈몽자회》(1527년)가 있다. 어문학자 최세진이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표기했다. 예를 들어 口는 ‘입 구’로, 目은 ‘눈 목’으로 썼다.
따라서 그는 한자에 앞서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자음과 모음의 소리를 알려주기 위해 한자를 활용했다. 각 자음 아래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ㄱ 기역(其役), ㄴ 니은(尼隱), ㄷ 디귿(池○末), ㄹ 리을(梨乙), ㅁ 미음(眉音), ㅂ 비읍(非邑), ㅅ 시옷(時○衣), ㅇ 이응(異凝), ㅋ 키(○箕), ㅌ 티(治), ㅍ 피(皮), ㅈ 지(之), ㅊ 치(齒), ᇫ 이(而), ㅇ 이(伊), ㅎ 히(屎)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등은 자음의 이름이 아니라 발음기호였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표기가 ○末과 ○衣다. 각각 동그라미 속에 한자를 적었다. 동그라미는 이들 글자를 한자의 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뜻으로 읽으라는 표시다. 그래서 池○末은 ’디귿’이고, 時○衣은 ‘시옷’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귿’과 ‘옷’ 두 글자는 저렇게 불편하게 썼을까? 한자에 ‘귿’ 발음과 ‘옷’ 발음의 글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자는 글자가 수 만 개에 이른다. 그래서 얼핏 한자는 음절도 아주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은 생각과 다르다. ‘귿’과 ‘옷’ 외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의 음 가운데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는 게 많다. 떠오르는 몇 가지만 살펴보자. 놀, 볼, 숨, 벼, 밥, 밭, 봅, 솜, 딱, 따
우리 조상들은 한자에는 없지만 쓸 일은 많은 음은 새로 만들었다. ‘놀’은 ‘노(奴)’에 ‘을(乙)’을 받쳐서 㐐로 썼다. ‘볼’은 ‘보(甫)’에 ‘을(乙)’을 받쳐서 乶라고 적었다. ‘솜’은 ‘소운(素雲)’이라고 적고 ‘솜’이라고 읽었다. 이 사례는 음이 일치하지 않지만 아쉬운 대로 그렇게 활용했다. 이처럼 우리말과 한자의 불일치는 크다. 이를테면 아주 쉬운 단어인 ‘쉽다’의 ‘쉽’은 한자로 표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히라가나 성공과 이두 실패의 이유
일반화하면, 한자는 몇 만 글자가 있지만 음절로 구분하면 410개 음절에 불과하다(출처: 지영재 《중국어 첫걸음》). 일본어의 음절은 몇 십 개로 이보다 훨씬 적어, 한자를 빌려서 표현하는 일이 간단했다. 그러나 우리말의 음절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만 추려도 1500가지에 이른다. 우리말에는 한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음절이 1000개가 넘는 것이다.
우리말은 음절이 풍부해 한자를 차용하는 방식으로는 일부 밖에 표기할 수 없다. 이는 이두가 신라 시대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활용됐지만 해결하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였다. 아울러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겠다는 뜻을 품게 한 동기였다.
풍부한 음절은 언어로는 훌륭한 특질이어도 문자를 만들기엔 불리한 변수였다. 이로부터 우리말을 문자로 담으려면 서양 알파벳처럼 음소(音素)로 접근해야 한다고 세종은 착안했으리라고 나는 추정한다.
세종은 음소 접근에 더해 세계 문자사에서 전무후무한 제자 원리를 생각해낸다.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만드는 대신 기본 글자꼴에 획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자음 제자에는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는 중국 음운학의 연구 결과를 활용했다.
《훈몽자회》에는 눈여겨 볼 대목이 더 있다. ㄱ에서 ㅇ까지는 발음을 한자 두 글자씩으로 설명했는데, ㅋ부터 ㅎ까지는 한 글자만으로 설명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종성(받침)을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여덟 글자로만 쓴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ㄱ은 초성과 종성 모두에 쓰이니 초성 발음은 기(其)와 같고, 종성 발음은 역(役)과 같다고 두 글자로 설명한 반면, ㅍ은 초성으로만 활용되고 종성에는 쓰이지 않으니 피(皮) 한 글자로만 설명했다.
‘종성을 여덟 글자로 쓴다’는 원칙은 한글 창제 후 3년 뒤인 1446년에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정해졌다. 받침에 ㅈ, ㅊ 대신 ㅅ을 쓰고, ㅌ은 ㄷ으로 , ㅍ은 ㅂ으로 적으라는 규정이었다. 많은 백성이 쉽게 익히고 쓰게끔 하자는 취지에서였으리라.
《훈민정음 해례본》은 나라에서 냈다. 서문은 예조판서 정인지가 썼다. 예조는 오늘날의 교육부, 문화부, 외교부의 업무를 맡았다. 정부에서 받침은 여덟 글자만 쓰라고 한 셈이다. 이후 나온 서적은 대부분 이 ‘받침법’을 따랐다.
세종이 받침 맞춤법을 어긴 이유는?
나라의 맞춤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책이 두 종 있었다.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다. ㅈ, ㅊ, ㅌ, ㅍ 등 자음도 받침으로 사용해, ‘심(深) 깊, 고(高) 높, 광(光) 빛, 개(個) 낱’ 등으로 표기했다.
두 책의 편찬자는 왜 나라의 맞춤법 규정을 어겼을까? 국어학자 이기문은 세종이 지시했으리라고 추측한다. 《용비어천가》는 세종이 한글 창제 이전인 1442년에 준비할 때부터, 1445년 편찬돼 1447년 간행되기까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책이다. 편찬을 지시했고 주해 작업 과정에서는 내용의 첨삭에 직접 관여했다. 《월인천강지곡》은 1449년에 세종이 지었다. 이 두 책의 표기법에 세종의 뜻이 반영됐으리라는 가설은 그래서 설득력을 지닌다.
이기문은 논문 〈훈민정음 친제론〉(1992)에서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관여한 신하들의 주장에 한 발 물러섰으나, 받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옳음을 믿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세종이 받침으로 여덟 글자만 쓰도록 하자는 신하들의 주장은 받아들였지만 두 책에서는 다른 자음도 받침으로 써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이 《월인천강지곡》 교정이다. 이 책은 인쇄 후 제본되기 전 ㅅ 받침으로 인쇄된 부분이 단어의 뜻에 따라 ㅈ이나 ㅊ으로 고쳐졌다. 또 ㄷ은 ㅌ으로, ㅂ은 ㅍ으로 바로잡아졌다. 붓으로 대충 써서 고친 게 아니었다.
국어학자 안병희는 논문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에 대하여〉(1991)에서 교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 첫째, 도장을 찍듯이 획을 추가했다. 둘째, 인쇄된 글자를 물로 씻어낸 뒤 새 글자를 찍었다.
세조는 자신이 쓴 《석보상절》과 선왕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월인석보》를 1459년에 펴냈다. 《월인석보》 중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앞의 교정을 충실히 따른다.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이 세종의 지시에 따른 결과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단어의 어간을 표기에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깁다’가 아니라 ‘깊다’로, ‘빗나다’가 아니라 ‘빛나다’로 표기되도록 했다. 두 책에는 받침 외에도 어간과 어미를 분리한 표기가 나온다. ‘눈에, 비늘을, 안아, 담아, 남아’ 등이다.
우리말 받침과 어간을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국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인정받는다. 주시경은 1906년에 낸 《대한국어문법》에서 “맞춤법은 본음을 적어야 하며 ‘깊다’라고 ㅍ을 적는 것은 이것이 본음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의 맞춤법 이론은 450년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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