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등 상소는 ‘한글 오해’ 푸는 열쇠②
[백우진의 좌충우돌] 한글창제의 비밀 ② 반대는 심하지 않았고, 세종이 홀로 창제했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몇몇 오해를 해소하는 실마리가 있다. 최만리 등이 올린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다.
사무치게 중국을 사모하면서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신하들은 한글을 창피해했다. 이는 상소 중 다음 문장에서 드러난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출처: 《조선왕조실록》)
최만리 등은 상소의 다른 문장에서는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이라며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우리나라는 역대로 중국으로부터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한다”고 자부했다.
널리 확산된 오해는 ‘한글은 조선이 중국 지배를 벗어나 독자 국가를 선언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따라서 명나라는 한글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리라’는 상상이다. 이 상상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소설《뿌리 깊은 나무》의 바탕이 됐다. 소설 속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추진한다. 이를 눈치챈 반대파는 한글 창제를 저지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을 잇따라 살해하고 세종까지도 겁박한다.
그러나 당시 한글에 반대한 신하들은 ‘명나라가 한글 창제 사실을 알고 노(怒)할까’ 두려워한 게 아니었다.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명나라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심리는 오로지 중화의 찬란한 한자에 비해 한글이 심히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글이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이며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고 깔봤다.
또한 독자 문자가 중화주의에서 이탈함으로써 중국을 도발하는 위험한 행위라는 소설의 인식은, 멀리 갈 필요 없이, 상소의 내용으로 기각된다. 중국은 주변 여러 나라의 자체 문자 창제에 대해 아무런 제재나 응징을 가하지 않았다. 최만리 등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라고 상소에 썼다.
최만리 등이 한글을 반대한 이유에는 부끄러움 외에 한자를 통한 ‘성리(性理)의 학문 궁리’로부터 멀어질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부끄러운 한글’을 왕 업적으로 돌렸을 리 없어
그러나 그들의 반대는 거세지도 않았고 지속적이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언문 반대 상소는 이 건 단 하나였다. 이 상소는 훈민정음이 1443년 12월에 창제된 지 두 달 뒤인 1444년 2월에 제출됐다. 그 전이나 후의 상소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새롭고 기이하지만 야비하고 상스러운’ 글자에 대해 계속 반대하는 일이 자신들의 품위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훈민정음에 대한 이런 평가는 협찬설의 설명 중 하나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진다. 협찬설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 등 신하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협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1443년 12월 기록,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 諺文 二十八 字)’는 문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해 한글을 만들었고 이를 왕에게 봉정했다. 일은 신하가 했지만 그 사업에 대한 상징적인 주체로 왕을 내세운 것이다.’
이런 풀이는 한글이 위대한 지적 창조물이라는 평가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여러 신하들은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수치로 여겼다. 그들에게 한글은 왕의 업적으로 봉정하기엔 너무도 하찮았다.
한글은 세종이 홀로 만들었다. 그 근거 문헌은 실록 외에 더 있다.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다. 신숙주는 앞 운서의 서문에 “어제(御制)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라고 적었다. 성삼문은 뒤 운서의 서문에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운학(韻學)에 마음을 두고 깊이 연구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고 전했다. 당시엔 한글이 엄청난 지적 창안이라는 인식이 희박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협찬설 오해는 수십 년뒤 설화집에서 등장
한글을 세종이 지었다는 기록에서 벗어난 주장은 세종 대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첫 오해는 성현(1439~1504)이 《용재총화》에서 전했다. 이 책은 설화집이고 한글이 창제된 지 40년 넘게 흐른 뒤에 쓰였다고 추정된다. 이 책은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해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해 언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언문청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세워졌다.
세종 한글 친제의 정황 증거는 《용비어천가》 등에서 교정된 글자들이다. (참조: 자음 이름의 유래와 한글 창제의 비밀 )
몇 년 전에 비해 한글 협찬설이라는 오해는 상당히 불식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고칠 자료가 종종 눈에 띈다. 그 중 하나가 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훈민정음’을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한 우리나라 글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 반면, 《고려대한국어사전》은 “1443(세종 25)년에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創製)한 우리나라 글자”라고 전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해석하는경우 종종 사실을 외면하거나 곡해하고 맥락을 놓친다. 당대에 기록된 사실과 맥락을 수용하자. 훈민정음은 세종이 홀로 지었다. 한글에 대한 신하들의 반대는 격렬하지도, 오래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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