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음(音) 위해 창제?” 세종 ‘육성’ 들어보자
[백우진의 좌충우돌] 한글창제의 비밀 ③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 창제 9년 전 ‘한자 장벽’ 언급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은 한자음(音)을 정확하게 배우고 구사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널리 퍼진 낭설이다. 이를 퍼뜨린 인물 중 한 명이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이다. 그는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중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다음은 그의 인터뷰 중 관련 부분.
- 한글 창제의 목적에 대해 논란이 있다. 당시 중국어를 잘 표기하고 배우기 위해 발음 기호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서문에 보면 어린 백성이 의사소통을 못 하니까 …
“중국과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 백성이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아니다. 정확히 읽어보면, 어린 백성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뜻을 펴지 못한다. 이렇게 돼 있다. 그러니까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 그렇게 돼 있다.”
- 어린 백성이라는 것은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어린 우리 조선사람들’이 되는가?
“왕의 통치를 받는 대부(大夫), 사(士) 계급을 말한다. 문자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거나 시문을 짓거나 하는 사람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음이 달라서 뜻이 안 통한다는 뜻이다. 노비까지 포함하는 전 민중적인 그런 의미의 백성은 아니라고 본다. -출처: 중앙일보, 「역사에서는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 2018.04.20.
첫째가 백성 편리, 둘째는 운서 바로잡기
훈민정음을 창제한 취지를 세종에게서 직접 들어보자.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출처: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경자 1번째 기사 중
이 세종 말씀에는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다. 세종이 한글 창제로 이루고자 한 바는 첫째 백성의 편리한 문자 생활이었다. 한자의 음을 바로잡는 일은 부차적이었다. 운서(韻書)는 한자의 운(韻)을 분류해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서적이다. 실제로 세종은 한자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도록 하기 위한 운서 《동국정운》을 한글 창제 후 5년 뒤인 1448년에야 냈다. 그보다 한참 앞서 1445년에 《용비어천가》를 간행했다.

이영훈 교장의 주장은 기본적인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문자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거나 시문을 짓거나 하는 사람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음이 달라서 뜻이 안 통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일찍이 7세기 초에 을지문덕은 어떻게 수나라 우중문한테 문자로 뜻을 전했으며, 신라에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외교 문서는 어떻게 제 기능을 했나?
한자의 특징은 뜻으로 통한다는 것이다. 한자 음은 지역마다 달랐고 시대가 흐르면서 변했다. 그러나 수천 년 전 한자 글을 요즘 중국인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조선에서 쓴 한문을 중국에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세종은 이후 직접 쓴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에서도 백성이 쓰기 쉽도록 한글을 지었음을 밝혔다. ‘국지어음 이호중국(國之語音 異乎中國)’으로 시작하는 서문이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에 간행됐다. 이 서문에는 운서를 언급하지 않았다. 《세종실록》에서 인용된 앞의 세종 말씀은 1444년에,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두 달 뒤에 이뤄졌다.
세종의 《삼강행실도》 언급에도 창제 취지 있어
세종은 한글 반대 상소를 올린 부제학 최만리 등을 꾸짖으면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 대한 구상을 내놓는다. 즉,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은 성종 12년(1481)에 간행됐다고 추정된다.) 이 구상 또한 한글 창제 동기가 백성에게 쉬운 문자였음을 뒷받침한다.
세종은 백성 교화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쉬운 문자의 필요성을 오래 전부터 절감하고 있었다. 세종은 한글 창제 9년 전인 1434년에 한문으로 된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게 하면서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라고 염려했다. 그래서 “널리 학식이 있는 자를 구하여 두터이 장려를 더하도록 하되, 귀천(貴賤)을 말할 것 없이 항상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부녀까지도 친속(親屬)으로 하여금 정성껏 가르쳐 분명히 깨달아 모두 다 알도록 하고”라고 지시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한글 창제가 세종에게 장기 과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한글을 둘러싼 오해가 여럿 있다. 다른 문자 모방설, 승려 신미 기여설, 1443년 창제 후 1446년 반포했다는 설 등이다.
다른 문자 모방설은 한글의 제자 원리가 전무후무하다는 사실로 간단히 기각된다. 신미 기여설은 세종이 단독 창제했다는 사실과 양립 불가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만리 등 상소는 ‘한글 오해’ 푸는 열쇠]에 참고할 내용이 있다.
세종이 창제 후 약 3년 뒤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했다는 주장은 과거 국어학자들이 《세종실록》 28년(1446년) 9월 29일자의 “시월 훈민정음 성(是月 訓民正音 成)”을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됐다”고 오역한 뒤 ‘한글이 1443년에 처음 만들어진 뒤 시험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됐다’고 오해하면서 비롯됐다.
심재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사람의 말과 글》에서 “그러나 이 문장에서 훈민정음은 한글이 아니라 자모를 만든 원리와 용례 등을 담은 책을 가리킨다”며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불리는 책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설’은 두 시기 사이에 국가적으로 이뤄진 여러 한글 서적 편찬 작업에 비춰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용비어천가》도 이때 편찬됐다. 왕조의 기원과 조선 건국을 찬양하는 이 서사시를 한글을 시험해보기 위해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계인이 찬탄해마지 않는 한글.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든,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쉽고 편리한 문자. 인류 문화의 걸작. 점점 더 많은 세계인이 배워서 쓰는 문자. 이런 한글을 우리가 오해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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