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에 살아 숨 쉬는 녹두장군의 얼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주말 남태령에서 시위했던 농민들 동학의 전봉준 장군 연상시킨 시위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녹두장군
전봉준 투쟁단의 ‘폐정개혁안 12조’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하면서 남태령에서 경찰과의 28시간에 걸친 대치 끝에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까지 트랙터 13대를 몰고 온 농민 집회를 주도한 단체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전봉준 투쟁단’이다.
‘전봉준 투쟁단’은 전남과 경남에서 각각 출발한 후 공주 우금치에서 합류해 출정식을 가졌다. 우금치는 1894년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이 조일연합군과 운명을 건 혈투를 벌인 전투지이다.
‘전봉준 투쟁단’은 우금치 출정식에서 ▲윤석열 구속 ▲국민의힘 해체 ▲군대·경찰 개혁 ▲경자유전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해 농지를 농민에게 돌려줄 것 ▲개방 농정을 철폐할 것 등 ‘폐정개혁안 12조’를 발표했다.
폐정개혁안의 시초는 130년 전 전봉준이 전주 화약의 조건으로 관군의 초토사 홍계훈에게 제시하였던 개혁안이다. 당시 ‘개혁안 12조’에는 탐관오리 엄징, 노비 문서를 불태워버릴 것, 무명잡세를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왜와 간통한 자 엄징, 토지 배분 등이 제시됐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래로부터의 근대적 개혁과 반외세를 동시에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 그 정신은 이후 항일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됐다.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증조부인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쌓은 후 사용료를 부과하고, 자신의 아버지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엄청난 조세를 걷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조병갑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농민들을 관아로 잡아들여 불효, 음행, 잡기 등의 죄목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가뭄이 들어도 세금을 줄여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다.
1893년 12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고부의 동학교도들은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상소의 첫 머리에 이름을 적은 사람)로 삼아 관아를 찾아가서 조병갑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전봉준 일행을 관아에서 쫓아냈다. 전봉준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는 고부의 동지 20명을 규합했다. 그리고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어디 남겠나”라는 내용이 담긴 사발통문을 전라도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돌렸다. ‘사발통문’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여자의 명단을 빙 둘러 적은 문서이다.
전봉준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몰려든 동학교도들이 1000여 명. 전봉준은 이들과 함께 거사를 맹약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급습을 받은 조병갑은 전주로 피신하고 관아에 있던 군졸들도 제각기 무기를 놓고 줄행랑을 쳤다.
고부 관아를 접수한 전봉준은 무기고를 털어 농민군을 무장하도록 했다. 또 불법적으로 빼앗겼던 세곡을 창고에서 꺼내어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다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내걸고 용맹하게 싸웠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전라도 지역을 동학농민군에게 내준 조정이 청과 일본에 출병을 요청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수세에 몰렸다. 이에 현상금에 눈이 어두웠던 예전의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들이닥친 관군에 의해 전봉준은 체포되고 만다.
신분 차별을 없애고 가혹한 세금 줄이고,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이렇게 무너진다. 체포된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된다.
이 장면을 묘사한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 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 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민중들, 녹두장군을 노래하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된 뒤에 이미 조선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일본군의 고문은 가혹했다. 그러나 전봉준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의 것이다’는 봉건적인 세상에 반기를 들고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전봉준의 신념은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문과 수차례에 걸친 취조에도 굴하지 않던 전봉준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때의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 손화중․김덕명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
파랑새는 누구일까
전봉준의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민중들 사이에서 회자됐던 이 노래는 전봉준에 대한 민중들의 살가운 애정과 경외심을 담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아리랑처럼 대개의 민요가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금씩 그 모습을 바꾸었듯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도 다양한 가사가 전해지고 있다.
가사의 해석을 놓고도 이견이 많은데 가장 큰 쟁점은 ‘파랑새’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파랑새는 희망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전봉준의 ‘전(全)’을 파자(破字)하면 팔(八)+왕(王)이 되어 ‘파랑’과 같은 발음이라는 것이다. 즉 전봉준이 새로운 왕 ‘팔왕’이 되어 나라를 잘 이끌어 달라는 바람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구절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당시 전봉준은 키는 작았으나 알찬 녹두처럼 다부져서 ‘녹두장군’으로 불렸는데, ‘전봉준을 지칭하는 파랑새가 전봉준을 상징하는 녹두밭에 앉지 마라’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랑새의 파랑은 ‘팔왕’이 아니라 청(淸), 즉 농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땅에 온 청나라 군사와 일본 군사들을 싸잡아 일컫는다는 해석도 나온다. 청(淸)은 ‘푸를 청(靑)’과 음이 같고 일본군은 당시 푸른 군복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봉준의 최후는 장렬했다. 집행관이 교수대 위에 선 전봉준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다른 할 말이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며 집행관을 꾸짖고는 태연히 오랏줄에 목을 걸었다.
아! 녹두장군 전봉준.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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