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의 외신 기자회견이 부끄러운 또 다른 이유
[신지영의 품격 있는 한국어 사용법] 한 총리의 공식언어는 영어인가
한덕수 국무총리의 외신 기자회견
10.29 참사 사흘 후인 11월 1일 오후,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내 언론의 기자들에게는 틈을 주지 않던 국무총리가 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하루 전날인 11월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정부현안보고에서도 질의 없이 현안 업무 보고만을 하겠다던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너무나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신에만 답변하는 정부
외신 기자회견 소식을 듣고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 아닌가 화가 났다. 외신의 질의에는 국무총리가 자처하여 응하고 국회의원의 질의에는 장관도 응하지 않겠다니 말이다. 정부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보다 외신기자들을 더 고려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를 두고 국회와 국내 기자들이 왜 분노하지 않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악순환일 수도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인 기사를 날카롭게 쓰는 외신이, 정쟁으로 목소리에 힘을 잃은 국회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사의 중심이 바뀌어 버리는 국내 언론보다 훨씬 두려울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입맛이 몹시 씁쓸했다.
일말의 기대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아주 조금은 기대를 했었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이니 외신에게 혹시나 참사의 이름에 ‘이태원’ 혹은 ‘서울’을 빼 달라는 당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했다. 이번 참사의 이름에 ‘서울’이나 ‘이태원’과 같은 지역명이 들어 가면 해당 지역에 낙인이 찍히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외신에서 ‘Itaewon Holloween crowd crush’, ‘Itaewon crowd crush’, ‘Seoul Halloween crush’ ‘Seoul crowd crush’ 등으로 불리며 굳어가고 있는 것을, 정부의 고위공직자라면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참히 무너진 기대, 웬 영어?
이런 기대는 기자회견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처참히 무너졌다. 기자회견의 진행을 맡은 국무총리 대변인의 첫 발언부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진행자인 대변인은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고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 후 “영어를 잘 못하지만 조금만 영어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한국어로 한 후에 영어로 행사를 진행했다. 영어로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하며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대변인의 영어는 한국어로 동시통역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대변인이 자신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한국어는 완벽한 주변어였다.
어, 이게 뭐지? 동시통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대변인이 공식적인 시작 언어를 영어로 삼고 있었다. 한국어는 공식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변명을 하는 변명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변인의 영어가 한국어 통역으로 흐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회견의 시작부터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어리둥절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한 총리 자신도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진행자가 진행을 하지 않고 자신이 준비한 영어 원고를 읽고 끝냈기 때문이다. 자신이 호명되어야 하는 시점인 듯한데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한 총리가 잠깐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진행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진행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한 총리는 스스로 입을 열었다.
충격적인 한덕수 총리의 시작 발언
그런데 이어지는 한 총리의 시작 발언은 어리둥절이 아니라 충격적이었다. 외신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한국어로 회견을 진행하겠다는 얘기를 영어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말 또한 한국어로 동시통역이 이루어졌다.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동시통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신 앞에서 영어로 회견의 시작을 알리며 영어로 응당 해야 하는데 더 잘 답변하기 위해 한국어로 하겠다는 말을 영어로 하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총리의 이러한 태도가 어쩌면 우리 정부의 태도와 판단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허탈했다. 오랫동안 공무원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온갖 직책을 맡아 수행해온 사람의 판단력과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부적절한 농담에서도 드러나는 책임 회피
한 총리가 기자회견을 임하는 태도를 알려 주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장 언론에 많이 회자되었던 부적절한 농담이다. 회견이 시작된 지 약 25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미국 NBC 기자로부터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후였다. 질문을 받은 후 동시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한 총리는 직전에 받았던 질문을 이용해서 “이렇게 안 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고 발언한 것이다.
나름대로는 농담을 통해 자신의 불쾌감도 표시하고 분위기도 부드럽게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본인은 세련된 농담을 통해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런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데다가 세련되지도 못한 농담이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아재 개그’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한 총리의 농담이 부적절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에 대해 외신이 날선 보도를 이어가자 자처하여 연 기자회견이 아니었던가? 농담하는 한 총리의 여유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이유였다. 게다가 이 행사의 최종 책임자는 본인이다. 국무총리실에서 주최한 행사가 아닌가? 그러니 통역기에 문제가 있다면 책임자로서 세심히 살피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과를 해야지, 이렇게 안 들리는 책임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은 한 총리의 상황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참사의 책임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불쾌감이 확 밀려왔다.
외신에게 영어로 답변하는 대한민국의 총리
가장 충격적인 것은 기자회견 약 48분 경부터 이어진다. 모두 발언을 하기 전에 정확한 답변을 위해 한국어로 진행하겠다고 영어로 말하던 총리가 영어로 답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텔레그래프의 기자가 한 영어 질문에 대해 총리가 갑자기 영어로 답하기 시작한다.
시작할 때의 발언에 비추어 보면, 아미 정확한 답변을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후 질문에 대해 한 총리는 약 40분 가량 영어로만 답변을 했다. 질문이 한국어든 영어든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한국어가 먼저 튀어나오자 사과를 하고 영어로 이어가기도 했다. 이후 마지막 50분 남짓은 질문 언어에 따라 한국어와 영어를 왔다갔가 하며 답변했다.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았지만 2시간 20분 가량 진행된 회견에서 한 총리가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영어로 답변한 것이 절반을 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고위공직자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공식 언어는 한국어다. 설령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공직자는 공식석상에서 한국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한국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너무 상식적이라 말하기도 부끄럽다.
리더는 판단하고 책임지는 자
혹시 한 총리가 영어를 선택한 이유가 회견 초반부에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는 표현을 너무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두고 외신 기자가 지적한 것을 듣고 아예 영어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은 한국어로 답변했을 때 너무 정확하고 선명해져서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영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서는 부적절한 태도임이 명백하다.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을 내세웠다. 풍모와 말, 글씨체, 그리고 판단력이 그것이다. 하지만 고급 관료의 경우는 등용 시의 기준과는 달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판단력’이 되어야 한다. 신임 관료에게 ‘신언서’는 과거부터의 축적을 통해 현재를 드러내는 것이고 ‘판단력’은 잠재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급 관료에게 ‘신언서’를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리더는 판단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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