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잘 통하고 있는가?
[신지영의 품격 있는 한국어 사용법] 우리는 누구를 중심에 두고 소통할까 자기중심적 소통, 상대에 불쾌감 줄 뿐 소통에 대한 고민의 깊이는 상대에게 가 닿고 싶은 ‘절실함’에 비례
내 일정에 맞추겠다더니
몇 달 전의 일이다. 동영상 콘텐츠를 찍고 싶다는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출연 의향이 있는지, 있다면 기획 회의를 위한 가능한 일정도 함께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학교와 관련된 일이라 출연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정이 문제였다. 긴 연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매우 분주했다. 밭은 일정이라면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섭외 편지에 일정을 잡았으면 하는 범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리 급하지 않아 보였고, 내 일정에 전적으로 맞춰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당시의 일정들을 고려하여 2주 후로 가능한 일정 몇 개를 적어 보냈다. 답장을 쓰면서 빠른 소통을 위해 내 핸드폰 번호도 적어 보냈다.
이메일을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문자가 왔다. 긍정적 답변에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기획 회의를 더 당길 수는 없는지를 물었다. 만약 일정을 당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내가 제안한 날짜 중 가장 빠른 날짜에 만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빨리 만나고 싶었다면 섭외 편지를 보낼 때 기획 회의를 언제까지 마쳤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추가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그러니까 기획 회의 1주일을 남긴 시점에서 이번에는 연휴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며 연휴 전에 촬영 가능한 일정을 묻는 문자가 왔다. 기획 회의가 잡힌 다음 주 금요일부터 긴 연휴가 시작되는 상황이었다. 짜증이 났지만 학교 채널에 올리는 영상이라서 학생들이 찍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좀 미숙할 수 있겠거니 이해하려 했다. 더욱이 이 상황에서 섭외를 다시 시작한다면 더 곤란해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최대한 협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렵게 시간을 뺐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개발해야 하는 주제를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니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기획 회의를 하러 온 사람들은 뜻밖에 학생이 아니었다. 팀장과 PD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두 사람이 연구실를 찾아왔다. 학교가 외주를 준 모양이었다. 회의 자료를 만들어 온 솜씨는 프로다웠다. 2021년 출간한 <언어의 높이뛰기>와 내가 출연했던 영상들을 꼼꼼히 보고 두 개의 기획안을 잘 짜왔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주제를 잡고 회의를 마치려 할 때 즈음, 의외의 요구를 했다. 영상을 찍기 위해 A4 용지 4쪽짜리 대본을 작성하여 촬영 며칠 전에 미리 보내 달라는 게 아닌가! 촬영 전에 발주처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인 데다가 긴 연휴로 인해 많은 일들이 몰린 상황이라 정말 당황스러웠다. 슬라이드를 만들어서 짧은 강연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수락했는데 A4 용지 4쪽짜리 대본을 써야 한다니! 그렇다면 섭외를 하는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구체적인 일의 내용과 대략적인 일정을 정확히 말해 주었어야 했다.
처음에는 내 일정에 전적으로 맞출 수 있는 것처럼 섭외 메일을 보내더니 막상 내가 가능한 일정을 보내니 일정을 재촉했고 만나기도 전에 급하게 촬영 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촬영을 코앞에 두고 회의에 와서는 촬영을 위해 적지 않은 분량의 대본을 작성해야 한다는 의외의 일거리를 안겨 주었다.

소통 부족, 운다고 풀릴 일인가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의 일정은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들의 상황을 신경 쓰느라 나의 일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못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들의 프로젝트를 망치는 나쁜 사람이 될 터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존중받지 못했고 그 일을 하기 위해 하는 수없이 잠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회의를 마치며 나는 그간의 소통 과정에서 존중받지 못해 아쉬웠던 점들을 조목조목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과정에서는 부디 내 입장을 고려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왜 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게 미안해서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면 무엇이 왜 미안한지 말하고 사과를 해야지 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연구실을 떠난 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우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런 상황에서 우는 것은 부적절한 것일까?
상대가 울면 이유야 어떻든 사람들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러니 미안해서 울게 되면 역으로 상대를 미안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욺으로써 미안한 사람과 미안하게 만든 사람이 일시에 역전된다. 그러니 우는 사람에게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일하는 상황에서 화를 내는 대신, 혹은 분한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혹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울어버리는 것은 매우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다. 화가 난다면 화가 나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전해야 하고 분하면 분한 상황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게다가 정말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 일터는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위한 곳이 아니다.
문자가 아닌 전화로 소통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촬영 당일이었다. 주차장이 있으니 차를 가져와도 된다는 말에 차를 가지고 스튜디오를 향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스튜디오가 있는 골목길을 들어서려 하는데 이삿짐 트럭이 골목길의 중간을 막고 있었다. 트럭을 지나야 스튜디오에 닿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언뜻 보니 제작사 PD가 보낸 문자였다. 운전 중인 데다가 뒤에서 차가 오는 바람에 문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장소를 벗어나 문자를 확인해 보니 이삿짐 차가 골목을 막고 있어서 우회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차를 운전해 가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 도착 시간 20분 전에 문자로 안내를 하다니! 그 상황에서 긴급하게 알릴 일이 있다면 문자보다는 전화를 했어야 한다. 전화기를 손에 들지 않고도 통화를 할 수 있는 자동차 환경이 만들어진 지 오래가 아닌가! 물론,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거나 불편해한다면 문자는 그때 대안이 되어야 한다.
그가 보낸 문자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다. 초행길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참조 장소를 기준으로 우회 방법이 안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라고 해도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참조물이 되기 어려운데 지역의 카페를 참조물로 해서 우회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었다.
소통에 문제가 심각하구나 생각하고 전화를 했다. 전화를 통해서도 의사소통은 쉽지 않았다. 듣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설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야기해 준 정보들을 바탕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단 전화를 끊고 큰길로 나갔다. 나가서 보니 문자에 참조물로 적힌 카페가 보였다. 안내대로 카페가 보이는 골목으로 우회전을 하려는데 진입금지 표시판이 보였다. 스튜디오에 접근하려면 일방통행을 어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PD에게 전화해서 법을 어길 수는 없으니 근처 유료 주차장을 찾아서 주차를 하고 가겠다고 했다. 일찍 출발한 덕에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았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촬영은 무사히 마쳤다.
소통의 중심은 누구여야 할까
이 일은 섭외부터 스튜디오에 도착하기까지 곳곳에서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런 답답한 소통을 하게 된 이유는 누구를 중심에 두었느냐와 관련이 있다. 그 중심을 소통의 대상자에게 두었다면 섭외의 이메일을 보낼 때부터 촬영 장소의 상황을 알리는 일까지 훨씬 더 매끄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 긴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안내 문자를 보내지도, 초행길인 상대가 알기 어려운 참조 장소를 기준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소통을 잘하고 싶다면 상대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고민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통을 한다면 소통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불편을 넘어 불쾌감이 들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불편하고 그런 불편함을 주는 것은 그만큼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결국, 나는 그에게 배려받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얼마나 잘 소통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소통에 있어서 소통의 상대방을 중심에 두려 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소통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결국 상대에게 가 닿고 싶은 절실함에 비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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