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한 당신에게

[신지영의 품격 있는 한국어 사용법] 장시간 혼자 떠드는 당신이여 앉아 듣기만 해야하는 이들의 불편 아는지 왜 이런 ‘대화 안되는 자리’가 만들어질까

가끔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특권인 듯 초청자가 대화를 독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케티이미지뱅크
가끔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특권인 듯 초청자가 대화를 독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케티이미지뱅크

나 혼자 말한다!

얼마 전 한 오찬에 초대되었다. 중요한 일을 마치고 이어진 멋진 공간에서의 점심 식사 초대였다. 큰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초청자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명이었다.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점심 식사 내내 초청자는 혼자서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했다. 누군가가 다음 일정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세 시간은 족히 붙잡혀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다음 일정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초청자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모임을 파했다. 우리는 모두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밥을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이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뭐가 그리 중요하고 절박한지 초청자는 절대로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언권을 지키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인 듯 보였다. 말이 더 고픈 탓인지 식사는 이미 뒷전이었다. 유독 가벼운 식사를 시킨 것도 혹시 자신의 발언권 유지를 위한 전략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꿋꿋하게 지킨다!

오찬의 초청자인 데다가 연세도 아주 높은 분이어서 누구도 그분의 발언권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아니, 도전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알려야 할 절박한 내용도 아닌데 뭐가 그리 절실한지 그는 불손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듯이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 도중에 아주 잠깐의 틈을 타서 한 참석자가 다른 화제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초청자는 그 사람의 말을 바로 끊어버리고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한참을 듣다가 겨우 말할 수 있는 틈을 타서 말을 꺼내려했던 그 참석자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덧 직업병이 도져 관찰자 시점이 된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뻔했다.

억지로 입을 다물게 된 그분을 보고 참석자는 모두 발언권을 포기하고 수동적인 경청 모드에 돌입했다. 발언권을 독점하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그의 뻔뻔함이 놀랍고 신기했다.

혼자, 오래 말하기 위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선택한 이야기의 소재였다. 그가 선택한 이야깃거리는 혼자, 오래 말하기에 정말 최적이었다. 6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벌어진 개인의 경험담이었으니 말이다.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이어진 조직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니 오래 말하기에 적합하다. 게다가 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신의 경험담이어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거나 보태기가 어렵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개인의 경험담이기는 했지만 누구나 다 아는 조직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어서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럭저럭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어서 듣기에 많이 지루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 조직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듣는 자리였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초청자의 강연을 듣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초청자는, 자신이 장으로 있는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한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그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초청자는 발언권을 독점함으로써 나머지 참석자들을 원치 않는 강연에 초대한 꼴이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강의를 하듯이 혼자,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그날 모임의 취지에 전혀 맞지 않았다. 참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옷을 잘 입는 것과 같다.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은 아무리 고급스럽고 아무리 잘 어울린다고 해도 옷을 잘 입었다고 할 수 없다. 말도 그렇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상황에 적절하지 않다면 잘한 말하기라고 할 수 없다.

좋은 강연은 강연장에서 해야 적절하다. 초청자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초대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다면 그것은 부적절한다. 부적절을 넘어 무례한 일이다. 초청자는 참석자 모두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여 참석자 모두가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초청자에게 요구되는 예의다.

하고 또 하고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초청자의 이야기가 참석자 모두에게 정말 처음인가 하는 것이다. 그분과의 첫 대면인 나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지만 이미 몇 번 초청을 받았던 나머지 참석자들은 듣고 또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혼자 오래 말할 수 있는 소재가 한 사람에게 그리 다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그날 초청자의 이야기가 참석자 모두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초청자의 말하기 성향, 즉 혼자 오래 말하는 강연 스타일의 말하기 성향은 그날이나 그 이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번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날 초청자의 말을 들으며 ‘또 강의 시작이네!’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참석자들에게 그 자리는 유쾌한 자리가 되기 어렵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런데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그날의 점심 자리처럼 사교를 위한 자리에 갔다가 혼자, 오래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분들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경향이 있어서 몇 번만 만나면 그 사람의 레퍼토리는 동이 나 버린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을 보면 기억력이 탁월한 듯도 한데,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과 있을 때 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신기하다. 어쩌면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걸 기억했다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어야 하는 재앙이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늘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인 듯, 경청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취해서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간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권력자의 횡포

이런 말하기 패턴을 보이는 사람은 대체로 모임에서 가장 힘이 있거나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미 몇 번을 들어 외울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절대로 내색을 하지 못한다. 그런 내색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며 경청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권력 차이가 클수록 반응의 빈도는 높고 강도는 강하다.

그러다 보니 발언권을 독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발언권을 독점할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신과 권력의 격차가 큰 하급자들과의 자리를 자주 갖고 싶어한다. 열광적인 반응 속에서 혼자 오래 발언권을 안전하게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강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과의 자리가 불편하고 즐겁지 않은 것일까? 이런 사람들과의 모임을 파하고 나면 뭔가 씁쓸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청객이 되는 불편함

그 이유는 바로 모임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방청객으로 동원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출연자다. 그런데 발언권을 독점함으로써 혼자 출연자가 되고 나머지 모두를 방청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화 상대자를 대상화해 버린 것이다.

방청객은 출연자가 아니다. 출연자에게는 크든 작든 프로그램 안에서 역할이 주어진다. 하지만 방청객은 출연자에게 반응하기 위해 모인 사람일 뿐이다. 방청객에게는 프로그램 안에서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출연자인 줄 알고 갔는데 방청객이 되어 앉아 있다면 유쾌한 기분이 들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의 모임에서는 늘 방청객 역할이 비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어떨까? 게다가 그 내용이 항상 반복되거나 너무나 뻔하다면? 비자발적인 방청객 역할은 더더욱 곤혹스러워진다. 그러니 그런 사람과의 모임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하고 싶어질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는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이거나 그와의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있거나 그런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재미없고 지루한 프로그램임을 뻔히 알면서도 방청객으로 자원하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대화의 자리에서 발언권을 지나치게 독점하는 것은 대화를 독백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된다. 대화가 독백이 되면 대화 상대자는 관객이 되고 자신의 말은 혼잣말이 된다. 대화 상대자와 자신을 동시에 소외시켜 버린다.

대화는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가 수평적일 때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가 수직적인 경우, 대화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대화가 어려운 이유를 물에 비유해서 생각하면 쉽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수직적인 관계로 설정된 대화라면 물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듯이 대화도 일방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대화는 독백이 되어버린다. 수직적인 관계가 설정된 상황에서 대화를 흐르게 하려면 높은 쪽이 많이 내려가거나 낮은 쪽이 많이 올라가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낙차가 큰 만큼, 기울기 조절은 매우 어려워진다.

반면에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수평으로 두고 시작한다면 조금씩만 높이를 조절해도 물이 흐르듯 대화가 흐를 수 있다.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대화 상대자가 살짝살짝만 높이를 조절하면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 대화가 흐를 수 있다. 결국, 물 흐르듯 대화가 자연스럽게 흐르려면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중요하다.

혹시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대화 상대자와 나와의 관계를 수직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대화가 하고 싶다면 대화 상대자를 반드시 나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시작해야 한다. 그 기울기를 서로 살짝만 조절해도 대화가 쉽게 오갈 수 있게 말이다.

만약 상대와 나를 동등한 위치에 둘 수 없다면? 대화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접는 게 모두에게 좋다. 단, 외로워질 각오는 꼭 해야 한다.

글쓴이

신지영 언어탐험가(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

신지영 교수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베이스캠프로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인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언어 탐험가다. 언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인문학자다. 저서로는 <언어의 높이뛰기>, <언어의 줄다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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