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이 안전한 대학 강의실 만들기
[신지영의 품격 있는 한국어 사용법] 학생들은 왜 질문을 하지 않을까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인데... ‘안전’을 만들지 못한 교수 탓이라면
질문하고자 진학한 대학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았던 필자는 질문을 마음껏 하고 싶어서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면 질문을 마음껏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대학 강의는 모두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줄 알았다. 교수와 학생이 학문적인 주제를 두고 토론하는 수업이라니! 대학은 정말 가 보고 싶은 신세계였다.
이런 비현실적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바로 고3이 될 무렵 시작한 미국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소개된 강의실 풍경은 질의응답과 토론이 오가는 치열한 공간이었다. 학생들끼리 모여 하는 ‘스터디 그룹’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학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하버드 대학의 풍경은 그야말로 내게는 유토피아였다. 아, 대학이란 저런 거였구나! 그럼 대학에 가야겠다! 대학은 그때부터 내게 ‘가야 할 곳’에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막상 대학에 가니 강의실 풍경은 내가 꿈꾸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토론식 수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에 간 이유가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던 만큼, 나는 강의 중에 질문을 했다. 대학 강의실에서도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질문하는 애’로 불리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가장 큰 차이는 질문을 대하는 교수자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교수자가, 대학에서는 동료 학생들이 질문에 관대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 강의실에서 질문을 하는 일을 두고 동료 학생들이 보인 반응은 낯섦을 넘어 ‘잘난 척한다, 돋보이려 한다, 나댄다’ 등등이었다. 질문이 잦아지자 나는 ‘그 질문하는 애’에서 ‘그 잘난 척하는 애’가 되었다. 억울했지만 궁금증이 억울함보다 컸기에 나는 계속 질문을 했다.
유학길에 오르게 한 궁금증
궁금증은 ‘국문과’ 학생인 나를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공부를 하다가 자꾸 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고 그 벽은 도저히 혼자서는 돌파할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유학밖에는 길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부모님을 설득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음성학의 본고장인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가장 좋았던 것은 지도교수와 격주로 하는 튜토리얼(개별 지도시간)이었다. 튜토리얼 시간에 나는 두 주 동안 공부한 내용을 구두로 보고하고, 공부하다가 이해하지 못했거나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다. 교수님은 내 질문에 답을 하시기도 했지만 질문을 더 많이 하셨다. 교수님의 질문은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나의 어떤 질문도 환대를 받았다. 교수님이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면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시면서 “좋은 생각을 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모든 질문을 좋은 질문으로 만드는 능력
영국의 박사과정생은 지도교수와의 튜토리얼 의무밖에는 없어서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영국의 강의실이 궁금했던 나는 많은 과목을 청강했다. 지도교수님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교수님의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통 음성학을 매우 낯설고 어려워한다. 그래서인지 학부 학생들의 질문은 정말 천방지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수님은 모든 질문을 ‘좋은 질문’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보여 주셨다. 교수님의 답을 들으면 모든 질문이 좋은 질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교수님의 답을 들을 수 없었을 테니 질문한 학생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질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강의실에서라면 “공부를 좀 하고 질문하세요” 혹은 “책 좀 찾아보세요”라는 핀잔을 들을 법한 질문들도 많았지만 질문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 질문은 학생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슴이 부풀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가서 학생들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지도교수님을 보면서 평범한 질문을 좋은 질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의도를 꿰뚫을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좌절의 시간
당연히 한국에서 나는 좋은 교수가 될 줄 알았다. 학생들이 궁금한 것을 물으면 궁금증에 답하면서 더 많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는 좋은 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강의실에 들어가니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으니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답시고 내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난감해 했다. 당황스러워하기도 했고 공포심을 드려내기도 했다.
학부는 그래도 나았다. 대학원생들은 더 심했다. 일단 대학원생들은 내 앞에서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강의 중에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라는 나의 질문을 받고 울기까지 했다. 발표한 내용 중에 한 부분을 짚어서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는데 울다니! 그게 울 일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궁지에 몰리는 것 같다거나 공격을 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돌아서 내 귀에 들어오기도 했다.
깨달음을 준 대화
처음 교수가 되고 몇 년은 고민이 정말 깊었다.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 다른 직업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막상 교수가 되어서는 학생들을 울리고 힘들게 하다니!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인가, 좌절과 혼란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의 이야기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사람은 함께 과제를 수행하고 있던 박사후연구원이었다. 대학원 석사 때 타과 과목을 수강하면서 알게 된 한 해 선배였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좀 늦게 시작한 탓에 막 박사를 마치고 연구팀에 합류하여 과제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과제 회식 자리에서 나는 왜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강의를 함께 들었을 때 신 교수는 일반적인 학생들과는 너무나 다른 학생이었어. ‘어,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궁금한 것을 너무나 당당하게 질문했지. 나는 너무나 일반적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질문하지 못하고 발언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 일단 나는 별로 궁금한 것이 없기도 했고, 설사 있다고 해도 표현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혼자 찾아보면 되지 뭐, 하고 생각했어. 이게 바로 나를 비롯한 일반적인 학생들의 생각이야”.
아, 내가 일반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왜 나와 같지 않냐고 생각한 거였구나. 내가 감수성이 부족했고 자기중심적이었구나. 그날부터 학생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언 장면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과 탐문을 계속하면서 뭔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교수자에게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교수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자신이 질문을 하는 것도 모두 평가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좋은 평가를 위해 발언을 주저했던 것이다. 또, 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질문에 내가 질문을 던지는 행위를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답을 알고 있으면 그냥 편하게 답을 말해주면 되지 왜 귀찮게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답정너’라고 생각한 거였다.
그간 선생님의 질문은 언제나 답을 요구했고 평가의 일환이었다. 문제 풀이 과정은 언제나 질문이 있고 그 질문에 정답을 찾는 일이었다. 늘 정해진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강의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체계화시키는 생각의 흐름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 생각의 흐름은 적절한 질문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남들의 평가에 민감한 학생들
결국, 학생들이 질문을 포함한 발언을 망설이는 이유는 발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학생들은 괜히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가 드러날까 봐 걱정했고 이를 통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교수와 다른 생각을 표현하거나 교수가 모르는 것을 질문을 해서 교수를 당황시킬 수도 있고, 그 결과 교수의 반격으로 자신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질문이 긍정적인 경험보다는 부정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차리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풍경이 바뀌지 않았으니 대학에 온다고 바로 바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수의 평가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의 중에는 질문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이 줄을 서서 질문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는 이유는 강의의 흐름을 깰까 봐도 있지만 질문을 했을 때 동료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함께 있었다. 교수에게 질문하는 것에 안전함을 느낀다고 해도 동료들의 반응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결과였다.
발언이 안전한 강의실
결국 강의실의 질문 풍경을 바꾸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교수자와 동료들에 대한 믿음 말이다. 나와 함께하는 강의실에서는 어떠한 발언을 해도 안전하며 모든 발언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학생들은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나는 더 반성이 되었다. 발언이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들을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질문을 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장 기본적인 개론 강의는 질문지를 매주 작성하게 한다. 탐구형 질문을 매주 1쪽 정도 작성하는 것인데 학생들은 이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나는 그 질문지를 다 읽고 어느 정도의 답변을 준비하여 강의에 임한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논의는 강의 중에 구두로 발언하는 경우로 한정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고 싶다면 강의 중에 발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질문은 다 좋은 질문
또 다른 과목에서는 질문지를 작성하여 조별 지도를 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때도 A4 용지 1쪽 분량의 질문지를 작성해 와야 한다. 그런데 가끔 질문지를 작성하지 않고 오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에게 왜 질문지를 작성하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럼 보통은 좋은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서라고 답한다.
이때 나는 꼭 묻는다. 왜 너의 질문은 꼭 좋은 질문이어야 하냐고. 그럼 학생들은 매우 당황한다. 나는 좋은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배우는 과정인데 어떻게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냐고, 그냥 갖게 되는 모든 질문과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격려한다. 그리고 좋은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가져 보자고 이야기한다.
발언이 안전한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발언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강의실 안에서 하는 발언은 너무 길거나 장황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저지하지 않는다. 길고 장황해지면 조금 압축해 보자고 힌트를 줄 뿐이다. 가끔은 부적절하게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그 적절성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 믿기에 가능하면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발언이 안전한 강의실은 교수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교수자의 변화 없이 발언이 안전한 강의실은 만들 수 없다. 그럼 우리 사회는 어떤가? 역시 발언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아닌가? 이제 우리 사회의 발언 안전도를 점검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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