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폭력으로 권력을 찾아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계엄 세력은 사법 절차에 대해 무모한 도전을 하면서 길을 찾고 있다”
개인적 폭력
폭행 피의자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고 법정에서 호소한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질병 탓으로 돌림으로써 면책받자는 의도다. 병에 걸린 것은 내 책임이 아닌데, 폭행은 병의 결과이므로 폭행 역시 내 책임이 아니라는 논리다.
미국 정신의학회 매뉴얼은 「파탄적, 충동조절 및 품행 장애」(Disruptive, Impulse-Control, and Conduct Disorders)라는 복잡한 제목 하에 한 무리의 조건들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분노조절장애(Anger-Control Disorder)”라는 진단명은 여기 없다.
다만, 여기에는 심하게 반항적인 청소년(Oppositional Defiant Disorder), 비행 청소년(Conduct Disorder), 훔치고 싶은 충동 때문에 물건을 훔치는 사람(Kleptomania), 불지르고 싶은 충동 때문에 불지르는 방화범(Pyromania)이 등재되어 있다. 이 조건들을 질병이라 보아야할 지에 대해 상식과 학계는 제법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등재되어 있는 것은 문제의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라는 진단이다. 사소한 이유로 발생한 격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언어폭력 및 폭력행동을 반복해서 휘두르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진단이다. 뇌질환이나 약물(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그렇다는 것이다. 화를 잘 내고 충동적인 성격이다. 더 쉽게 말해서 “뚜껑 잘 열리는” 사람이다.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의 폭행을 병의 증상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법의 정신’은 정의 구현을 지향하지만, 현실의 사법 체계는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이기에 어떤 판단도 체계 내에서 정합성(整合性)만 있으면 정당한 것이 된다. 이 중에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했더라도, 행위 당시 “법적 요구를 따를 수 없는 상태”였다면 면책 사유가 된다는 논의도 있다. 그렇다면 피의자는 “법적 요구에 따라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으므로 면책 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물론 일반인의 법감정과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이런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는 “정신병원에 평생 집어넣어라”라는 댓글이 달린다. 댓글을 다는 사람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범죄자의 의도에 분노했겠지만, “정신과 환자→ 위험 인물→ 정신병원 수감”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이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담고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큰 폭력을 너무 흔하게 대하다 보니, 우리는 미묘한 폭력에는 둔감해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집단 폭력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혼자일 때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집단 내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두 가지로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옆 사람과 함께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협조하면서도 나의 정체성은 유지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나 개인의 생각 없이 집단을 따르는, 개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완전히 집단에 동화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문제가 생긴다. 평소 폭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 집단 속에서는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재난 현장에서 벌어지는 약탈이 좋은 예다. 옆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판단할 필요 없이 그것을 따르면 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내려놓고 집단에 동화된 상태로, 로봇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쉽게 조종당한다. 격렬한 혐오를 쏟아내는 선동가가 나타나면 이들은 폭도로 변한다. 선동가의 지시를 따라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폭력을 저지른다.
이들이 법원의 문을 부수고 난입해서 온갖 파괴와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선동가가 폭력의 근원임은 자명하지만, 그는 자기는 폭력에 책임이 없다고 발뺌한다. 지금 구속상태인 수십 명은 ‘집단 속 로봇’에서 개인으로 돌아와서 제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속았음에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판단력이 떨어진 사람을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도 책임은 벗어나는 것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 수법이다. 집단 폭력 선동가는 “사이코패스적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 자율적 집단은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 상식적 판단력을 각자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옆 사람도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내가 폭력을 모방할 근거도 없다. 야구장에서 흥에 겨워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관중이나, K-팝 콘서트에서 야광봉을 흔들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팬들이 그렇다(물론 이들이 “훌리건”으로 돌변해서 집단에 동화되고 폭력적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탄핵 촉구 집회가 K-팝 콘서트장처럼 되는 것은 참여자들이 기꺼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뜻에 따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아의 힘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선동가에 넘어가지 않는다. 집단을 이용해서 돈을 벌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이코패스들은 자율적 집단에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집단 폭력 가해자에 대해 심판할 때 중요한 것은 “집단 속에서 다른 사람을 따라 한 것이 폭력의 책임을 가볍게 해주는 사유가 되는가?”라는 문제다. “불법임을 모르고 한 것”은 면책 사유로 중요하다. 법원에 난입한 피의자는 재판에서 “당시 분위기에서는 폭력이 범죄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을 것이다. 평소 폭력이 범죄임을 인지하고 있던 피의자가 집단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심신미약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폭력행위를 하도록 조종당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
인종청소는 인간성에 대한 잔혹한 폭력이지만 국제사법재판소는 한 국가의 권력을 쥔 “도살자”를 실제 재판에 넘기고 처벌할 능력이 없다. 도살자는 국제기구의 결정을 아예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아무리 폭력적인 정권도 자국 내에서는 자신이 벌인 짓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기반이 소수라도 있어야 정권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흔히 동원되는 것이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민족감정을 동원해서 피해 집단을 “우리를 파괴하려는 악의 무리”로 만드는 일이다. 정권이 저지른 일을 잔혹한 범죄가 아닌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한 위대한 과업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국가(정권) 폭력의 또다른 유형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집권 세력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가하는 폭력은 흔히 정보기관을 동원한 간첩 조작, 납치, 암살 등 소규모의 테러로 자행된다. 그런데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대놓고 시도한 것은 친위 쿠데타로 일거에 다수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적대적 민족이 아닌 국민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테러를 가하려면 강력한 정당화가 필요한데, 이들이 ‘국가의 적’이라는 프레임을 조작해내는 것이다(필자의 글 “혐오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참조). 적어도 소수의 국민은 조작된 주장에 확실히 동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거 우리 정권들이 애용했던 것은 “우리의 영원한 적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제된 언론을 통해 이를 퍼뜨려서 국민을 세뇌했다. 우리 역사는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들이 이런 프레임에서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낡은 방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종북은 더 이상 매력적인 메뉴가 아니다. 그러자 계엄 세력이 새로 선정한 적은 ‘중국’이었다. 시중에 퍼진 반중 정서를 이용하는 것이다. 부정선거론도 동원되었다. 선거에서 진 집권 세력이 선거가 엉터리라며 판을 뒤집는 것이 친위 쿠데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해서 “선거 부정이 있었고, 중국이 개입되었으며, 친중 세력이 나라를 망친다”의 프레임이 계엄 합리화를 위해 탄생했다.

또 한가지 달라진 것은 언론 장악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계엄 선포 직후 국민들을 국회로 불러모은 것은 방송이 아닌 SNS의 힘이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시민 혁명(2010년대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등)에서도 SNS의 위력 앞에 언론 통제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아이러니는 계엄 세력이 여론 장악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역시 인터넷을 통해서라는 점이다. 유튜브에는 집단 폭력 선동가들이 만드는 혐오 컨텐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필자의 글 “극우의 중독 유튜브, 문화생태계의 황소개구리” 참조). 폭력 정권과 폭력 선동 세력은 야합한다. 선동 세력은 일제히 친중 세력의 선거 조작을 외쳐댄다. 순간의 이해관계가 맞기 때문에 두 폭력 집단이 서로를 밀어주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탄핵 법정과 형사 법정은 계엄 세력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폭력으로 권력을 찾아오는 것이다. 탄핵을 무산시켜서 윤 대통령이 권좌에 복귀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계엄 세력은 사법 절차에 대해 무모한 도전을 하면서 길을 찾고 있다. 폭력 선동 세력은 이제 계엄 정당화가 아닌 헌법 무력화를 위해 동원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 대세가 기울었음이 확실해지면, 선동 세력은 계엄 세력과 갈라설 것이다. 오히려 계엄 세력에게 혐오의 화살을 겨눌지도 모른다.
착한 폭력은 없다
문명을 가장한 원시 사회에서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정당화된다. 정당화되는 중요한 구실은 폭력이 피해자에게 선(善)이라는 논리다. 피해자를 가만히 두면 악에 빠지게 되므로 그를 선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폭력은 그 방법으로 정당하다는 생각이다. 폭력으로 선을 추구한다는 이념은 저질러진 폭력 자체보다 더 심각하게 문명과 민주 사회를 파괴한다.
한 세대 전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은 대부분 그런 명목으로 가해진 폭력을 체험했다. 물론 당시에는 체벌이 폭력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으므로, 선생님들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 폭력의 기원은 멀리 가면 서당에서 훈장이 게으른 학생에게 종아리를 치던 것이지만, 가까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학생들을 천황에게 충성하는 도구로 길러냈던 것에 뿌리를 두었을 것이다.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만들어내려 했다. 이는 신체적인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정권에 의한 폭력은 지속됐다. 그들은 폭력을 “국민에게 행하는 선”이라 포장하기 위해 선전을 펼쳤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전두환의 “정의 사회”,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이 그것이다. 이 선전이 통하면 정권의 폭력은 국민을 위한 노력이 되므로 더 이상 정당화를 위해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화되었고 제도적 폭력은 어떤 경우도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시민사회에 공유됐다. 그렇게 살던 우리에게 윤 대통령은 결정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다행히 폭력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힘이 더 강했기에 그 폭력은 우리 사회를 파괴하지 못했다. 불법 계엄으로 재판받게 되었을 때 윤 대통령이 내세웠던 논리는 계엄 세력의 폭력이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좋은 것이고 폭력이 좌절됨으로써 우리나라가 더 나쁘게 될 것이라는 궤변이었다. 학생들을 대걸레로 때리던 교사의 논리와 같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할 때도 그런 논리였다. 해방후에도 어떤 이들은 일본의 폭력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윤석열 세력은 이들을 자신의 뿌리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선을 구현하기 위한 정당한 도구라 믿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민주 사회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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