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와 리빙랩의 실패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평가 ③] 과학전문가를 존중하지 않은 과학정책 진취적 ‘혁신’보다는 ‘과학기술 책임’만 과학의 사회 기여 방식, 단순하지 않아
과학기술 또한 사회혁신에 동참해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시민사회적 이념은 과학정책연구자들이 오래전부터 조금씩 주장해왔던 ‘리빙랩(Living Lab)’이라는 아젠다를 만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시민사회가 과학기술연구에 직접 참여해서 사회혁신을 주도한다는 리빙랩의 단순한 아이디어는 문재인 정부의 입맛에 맞는 과학기술정책으로 각광받았고, 수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매년 여기에 투자되면서 과학기술계보다 시민사회로부터 더 큰 환영을 받는 악순환을 창출했다. 과학기술정책이 포퓰리즘에 기반해서는 안된다는 교훈과 더불어 전문가에 대한 존중과 현장에 대한 경험이 없이 실행되는 포퓰리즘적 정책의 위험을 경고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리빙랩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리빙랩의 등장과 과학기술계와의 괴리
리빙랩은 ‘사회에 책임지는 연구혁신(RRI)’ 논의가 등장하는 2013년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등에 소속된 비슷한 연구자들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꽤 많은 보고서와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정작 과학기술계는 리빙랩 논의에 시큰둥했고, 리빙랩은 과학기술계에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다. 정병걸에 따르면 리빙랩에 대한 정의는 70개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리빙랩을 사용자 관여와 사용자 혁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누군가는 복수 행위자와 개방형 혁신을 강조하기도 한다.
리빙랩에 대한 정의는 불분명하지만, 정병걸은 한국에서 리빙랩이 논의되는 맥락을 꽤나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목표는 경제성장과 산업경쟁력 강화였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공급자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용자인 일반 시민의 요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격차와 양극화, 환경적 위험, 안전 등 사회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기여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사회혁신의 새로운 수단으로 리빙랩(Living Lab)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정병걸과 리빙랩을 주장하는 정책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이제 과학기술의 목표가 경제성장과 산업경쟁력 강화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여로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이미 주장했듯이, 나는 이런 주장의 배경이 되는 핵심적인 주장, 즉 과학기술이 경제나 정치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기술이 사회적 책임을 인지함과 동시에 과학기술을 통한 사회혁신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주장해왔다. 문제는 리빙랩과 RRI를 주장하는 인문학 배경의 연구자들이 이런 논의를 통해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을 강조하는 진취적 태도보다는 과학기술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윤리적 태도를 취한다는데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사회혁신의 과학기술 버전으로 리빙랩을 주장하면서 ‘혁신’이라는 적극적 실천보다 ‘책임’이라는 소극적 윤리만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학기술을 통한 사회적 혁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들의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만약 리빙랩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곳곳을 실험실로 삼아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시도”라고 정의한다면(윤찬영의 논문, ‘리빙랩(Living Lab)이란 무엇인가’에서), 리빙랩은 분명 과학기술의 사회적 실천이 확장되어야 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환영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적 방법론을 전혀 훈련받지 못한 일반인이 관여하는 연구활동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지, 전문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훈련 없이 무작정 사회문제를 해결하자는 실천이 무모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논의과정 없이 추진되는 리빙랩 사업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2006년 미국 MIT에서 시도되었던 윌리엄 미첼 등의 ‘플레이스랩 프로젝트’는 가정 내에 적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신기술을 개발하면서 공학자들이 실제 해당 기술의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근처에 상주하면서 문제해결을 시도했고, 매우 성공적인 기술연구의 사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플레이스랩스가 시도한 것을 리빙랩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인텔 등이 함께 주도했던 이 시도 속에서 여전히 기술개발의 주역은 과학기술자였고, 시민사회의 참여란 기업의 효율을 위해 동원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이런 개념의 리빙랩은 현재 대기업이 제품개발 과정에서 소비자의 수요를 정확히 추정하기 위해 동원하는 각종 방법론과 구별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사회혁신의 방법으로서의 리빙랩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한국의 리빙랩 주창자들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시도된 리빙랩을 모델로 삼는 것 같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유럽 좌파들의 정책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리빙랩 또한 이런 전통의 연장선 속에 놓여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제로 리빙랩을 수행해본 경험을 가진 과학기술전문가가 거의 없거나 이런 전문가들을 육성할 정책조차 없이 리빙랩 사업은 마구 확산되기 시작했고, 지역공동체가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적용이 되다보니 결국은 비슷비슷한 문제로 귀결되어 버렸다. 층간소음이나 쓰레기 배출 문제는 어느 지역사회나 모두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문제이고 이를 리빙랩으로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
마을단위에서 실시된 리빙랩은 결국 비슷비슷한 문제해결 방식으로 귀결되었고, 어떤 혁신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다음 정권에 그 운명을 맡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 지자체는 리빙랩과 비슷한 사업들을 졸속 추진했고, 결국 리빙랩은 과학기술을 통한 사회혁신이라는 당초의 목표는커녕 예산낭비라는 비난을 견뎌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사회문제해결 R&D 예산으로 매년 거의 1조 6천억원을 책정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현장적용 해결 R&D라는 사업에 매년 567억원을 쏟아부었다. 이는 총 현장적용 해결 R&D예산의 18%에 해당한다. 아마도 윤석열 정부에서 리빙랩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과학이 사회문제 해결하는 방법과 포퓰리즘의 왜곡
정병걸은 <사회혁신의 장으로서 리빙랩과 패러독스>라는 논문에서 리빙랩이 과학기술을 통한 사회혁신의 좋은 실천이 될 수도 있지만, 리빙랩 자체가 지닌 패러독스의 해결 없이 그런 혁신은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패러독스 중 하나는 리빙랩의 성과가 가시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화 과정에 중소기업 등의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사업화에 대한 강조는 리빙랩의 공공성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업화와 이익실현이 불가능한 리빙랩 프로젝트엔 기업의 참여가 저조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렇게 수행된 리빙랩은 아무리 좋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도 이를 확장할 수 없는 패러독스가 나타나게 된다.
정병걸이 주장하듯이 리빙랩은 “기존 연구개발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 과학기술 및 ICT 수요와 사회수요를 연계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정병걸도 인정하듯이 리빙랩에 대한 이론적 관심과 설립 시도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리빙랩의 성과를 판단하기 위한 사례와 증거는 부족하다. 외국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주목할 만한 성과나 효과가 없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리빙랩 계획이 수립, 실행되고 있다는 지적”이 등장했다는 점은, 문재인 정부가 리빙랩에 수천억 원을 쏟아부으면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전혀 창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한 2021년 보고서에서 사회문제해결 R&D는 ‘착한 과학기술’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수준의 보고서가 바로 문재인 정부에서 시행된 RRI와 리빙랩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명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개발만이 착한 과학기술이라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는 나쁜 과학자가 되고, 특허를 통해 큰 수익을 창출하려는 엔지니어는 나쁜 공학자가 된다.
과학기술과 사회의 공익 사이에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과학기술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임신한 여성의 입덧을 막는 약으로 개발되어 동물실험에서도 큰 부작용이 없었던 탈리도마이드는 1957년 출시되어 불티나게 팔려나갔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기형아 출산과의 연관성이 밝혀지며 금지되었다. 탈리도마이드는 당시의 기준으로 엄격한 임상시험을 거친 약물이었음에도 결국 동물실험의 한계를 노출하며 의생명과학계에 큰 교훈으로 남게 된 사건이다. 고엽제 또한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 의해 대량살포되었고, 고엽제의 성분인 다이옥신의 부작용은 전후 군인들에게 나타난 후유증을 통해서야 경각심을 낳게 되었다. 페니실린처럼 좋은 목적으로 개발된 항생제가 결국 항생제 내성 세균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고, 인간을 살상할 목적으로 개발된 원자력이 암치료에 응용될 것이라고 확신한 사람 또한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학기술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리빙랩은 그런 맥락에서 인문학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단선적 사유가 초래한 예산낭비에 가깝다.
탈원전,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리빙랩 모두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기조 속에 등장했다가 실패한 정책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민사회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촛불혁명과 함께 등장했으며, 정권을 획득한 이후 시민사회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는건 너무나 자명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행정부는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시민사회운동가들로 채워졌으며, 민주당은 독재정권에 항거한 운동권 학생회장 출신들이 장악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역사에서 새로운 세력이 국가를 주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국가가 경험하는 일종의 실험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실험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선 전문가가 필요한 분야에 제대로 된 전문가가 활용되어야만 한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사회를 강조하며 전문성을 놓치는 큰 실수를 범했고, 이는 여러 정책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이제 왜 문재인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 실패했는지를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점을 통해 분석해보기로 하자.

④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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