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기금화, 개문발차(開門發車)를!
[김병철의 퇴직연금 되살리기] 악인 없어도 시스템 실패할 수 있어 기업은 ‘책임 회피’ 위해 개방형 선호 노동계는 비영리 성격 ‘연합형’ 선호 정부, ‘가입 의제’ 카드로 실리 추구 1월말 ‘공공·민간 하이브리드’ 입법하자
지난 10편의 칼럼에서 필자는 퇴직연금 수익률 논쟁이 ‘국유화냐 아니냐’라는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며, 해법으로 ‘공공·민간 하이브리드 기금형 모델’을 제시했다. 방향은 이미 명확하다. 그럼에도 왜 개혁은 늘 출발선에서 멈추는가. 이번 글에서는 그 원인을 특정 집단의 도덕성이나 의지 부족이 아니라, 각 이해당사자가 처한 ‘경제적 유인(Incentive)’과 ‘제도적 선호’라는 보다 냉정한 관점에서 분석해 본다. 명분 뒤에 숨겨진 그들의 진짜 셈법을 직시할 때에만 실행 가능한 타협의 경로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50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을 두고 기금화 확대 논쟁은 오래전부터 반복돼 왔다. 수익률 제고라는 총론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기업·금융기관·정부·노동계·전문가 집단의 이해가 엇갈리며 개혁은 2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이 교착 상태를 단순히 ‘기득권 지키기’나 ‘도덕적 해이’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각 주체는 주어진 제도 환경 속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거나 비용과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의 논의 흐름을 경제적 유인의 관점에서 역추적해 보면, 각 주체가 선호할 수밖에 없는 모델과 그 이면의 정치적 셈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업: ‘정치적 리스크’ 회피와 ‘책임의 외주화’
기업들이 기금형 활성화에 미온적인 이유는 단순히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경영계의 입장을 분석해보면 ‘정치적 리스크’와 ‘배상 책임’에 대한 회피 기제가 핵심 동인으로 작동한다.
우선 기업은 노동계가 선호하는 ‘연합형(Alliance) 기금’ 모델을 상당히 경계한다. 이는 산별노조의 영향력이 기금 운용에 개입되는 것을 ‘경영 간섭’이나 ‘노사 갈등의 정치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노무 관리의 일환인데, 이것이 자칫 노사 간 힘겨루기의 장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방어 기제다.
기업들은 기금형을 도입해야 한다면, 노조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민간 개방형(Financial type,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기관)’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은 기금 운용의 주체가 되어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을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별도의 수탁법인을 만들기보다 기존 금융기관 내에 위원회만 두는 방식을 선호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운용 손실 발생 시 기업에 쏟아질 도의적·법적 책임을 외부(금융기관)로 전가하려는 ‘책임의 외주화’ 유인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정부: ‘이상(관할권)’을 버리고 ‘실리(가입률)’를 택할 것
관료 조직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관리·감독 권한이 강한 ‘기업형 수탁법인(별도 법인)’ 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시장 환경과 정책 효율성을 고려할 때, 정부의 태도가 유연하고 실리적으로 변화하고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가장 큰 변화는 ‘공공 기금의 활용’ 측면이다. 정부는 영세 사업장이 독자적으로 기금을 설립하는 것이 비용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무리하게 민간 기금으로 밀어넣기보다는,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과 같은 공공 기금 플랫폼으로 유입시키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자동가입(Auto Enrollment)’ 방식이다. 퇴직연금 의무화를 추진함에 있어 미가입 시 과태료 부과는 조세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정 기간 미가입 시 공공 기금에 자동 가입된 것으로 간주하는 ‘가입 의제’는 행정적 마찰을 줄이면서도 가입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것이다. 즉, 관료 조직의 유인은 이제 ‘통제’에서 ‘확산’으로, 그리고 민간에 맡겨두기보다 ‘공공 플랫폼을 통한 사각지대 해소’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동계: ‘무늬만 기금’에 대한 경계와 ‘거버넌스 권력’
노동계는 기금형의 본질이 ‘수급권 보호’와 ‘규모의 경제’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영리 기관이 주도하는 ‘민간 개방형’은 기존 계약형 제도와 다를 바 없는 ‘무늬만 기금’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노동계의 선호는 비영리 성격의 ‘연합형(개별기업이 아닌 기업연합)’이며, 개방형을 하더라도 별도의 ‘수탁법인 설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기금운용위원회내 노동계의 실질적 영향력 확보를 우선 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주인인 퇴직연금에 대해 감시하고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정당한 권리 주장일 수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이것이 과도한 경영 간섭으로 비칠 수 있다. 사실 이 ‘거버넌스 주도권’ 문제가 향후 타협 과정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가 될 것이다.
금융기관: ‘차악’의 선택과 불특정금전신탁의 딜레마
금융기관들의 셈법은 더욱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현재의 계약형 시장을 유지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기금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개별 기업이 기금을 만들어 자금을 빼가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는 ‘금융기관형 기금(민간 개방형)’을 차악으로 선호한다.
이 지점에서 금융권 내부, 특히 은행과 보험사는 ‘불특정금전신탁(Commingled Trust)’ 규제 완화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기금형 제도는 여러 가입자의 돈을 모아 운용해야 하는데, 이를 허용하면 자신들의 고유 영역인 예·적금 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금융기관은 ‘시장 방어’와 ‘신규 시장 선점’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의 규제 완화만을 선택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전문가 그룹: 독립성을 상실하고 ‘포획된 지성’
이 복잡한 난마를 정리해야 할 학계와 전문가 그룹은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들이 혼란의 증폭자일 수 있다. 경제학의 규제 포획 이론(Regulatory Capture Theory)이 경고하듯, 전문가들은 자신들을 후원하는 정부, 금융사, 기업 등의 논리에 ‘포획(Capture)’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여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각 후원 조직의 입맛에 맞게 해외 사례를 선택적으로 인용한다. “영국식은 이래서 안 된다”, “호주식은 시기상조다”, “영리형은 위험하다”는 식의 현란한 논리들은 겉으로는 학술적 조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혁을 지연시키는 명분으로 활용된다. 진정한 전문가라면 이해관계자의 논리를 대변할 것이 아니라, 오직 ‘가입자의 수익률’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쓴소리를 해야 한다.
1월 말 노사정 합의와 국회 입법의 ‘최종 조율’이 답이다
퇴직연금 기금형 활성화는 각 주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가운데 논쟁만 반복돼 왔다. 그러나 이제는 선택의 순간이다. 다행히 1월 말, ‘노사정 TF’에서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한 합의문 도출을 앞두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노사가 사회적 합의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방향은 분명하다. 국회와 정부는 노사정 TF의 합의 내용을 존중하되, 이미 발의된 안도걸 의원안 등 기금형 관련 법안들과의 ‘최종 조율(Fine-tuning)’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공공기금이 중소기업과 사각지대를 담당하며 ‘메기’ 역할을 하고, 민간 금융기관이 기금 운용을 통해 수익률 경쟁을 벌이는 ‘공공·민간 하이브리드 모델’이 중심축이 돼야 한다.
기금 활성화는 단일 모델로 불가능하며, 시장의 층위에 따라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 ▲공공 영역(영세 사업장)은 ‘가입 의제’와 같은 정책적 수단을 통해 공공 기금(푸른씨앗 등)으로 흡수하여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민간 영역(대규모 사업장)은 기업의 현실적 우려를 반영해 ‘민간 개방형(계약기반형)’을 허용하되, 노동계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탁자 책임’과 ‘투명한 거버넌스’를 장착하는 방향이다.
서로의 ‘경제적 유인’을 인정하고 이를 국회의 입법 과정에서 대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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