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개혁 ‘절묘한’ 합의...남은 숙제는

[김병철의 퇴직연금 되살리기]

  • [1분 핵심요약]
  • 효율과 통제의 조화 300인 이하 기금 확대 및 민간 경쟁 도입(시장형) + 독립 수탁법인 설립 및 근로자 이사 참여(거버넌스형) 합의.
  • 국민연금 개입 경계 공공기금 참여 조항의 리스크. 연금 간 기능 혼재, 기금 고갈 리스크의 전이, 민간 시장 위축(구축 효과) 우려.
  • 전문가의 시간 정치적 합의를 넘어 ‘어떻게 7~8% 수익을 낼 것인가’에 집중할 때. 독립적 위험관리와 전문 운용 시스템 설계가 성패를 결정.
  • [The Insight: 행간의 재구성]
  • 국민연금의 위기가 퇴직연금으로 옮겨붙지 않도록, 두 자산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자산을 기계적으로 분리·운용하는 기술적 방화벽이 필수적입니다. ‘기금형’이라는 큰 틀 안에서도 전문가가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자산배분 기술이 결합되어야 실질적인 7% 수익률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 정치적 합의라는 ‘배’를 띄웠다면, 이제는 데이터라는 자율주행 시스템’을 탑재해 운용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지난 11편의 칼럼에서 필자는 퇴직연금 개혁이 이해관계자들의 ‘경제적 유인’과 ‘제도적 선호’ 충돌로 인해 멈춰섰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갈등은 봉합되었고, 마침내 합의의 문이 열렸다. 지난 2월 6일 발표된 ‘노사정 TF 공동선언문’은 20년간 표류하던 퇴직연금 개혁의 역사적 전환점이다. 이번 12편에서는 대타협의 구체적 내용을 해부하고, 정치의 시간이 끝나고 도래한 ‘전문가의 시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제언한다. - 편집자 주

우리가 매달 꼬박꼬박 쌓아가는 퇴직연금은 국민 노후의 마지막 보루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지난 20년간 대한민국 퇴직연금은 ‘잠자는 돈’이었다. 2%대의 초라한 수익률은 물가 상승률조차 따라잡지 못해 실질 가치를 까먹고 있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근로자의 몫이었다. 원인은 단순했다. 전문성 없는 개별 기업과 근로자가 금융회사와 1대일로 계약을 맺는 ‘계약형’ 구조 아래서, 아무도 수익률에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고질적인 저수익 구조를 깨기 위해 전문가들이 오래전부터 제안해온 해법이 바로 ‘기금형 퇴직연금’이다. 흩어진 퇴직금을 거대한 ‘기금(Fund)’으로 모아 규모의 경제를 만들고, 전문가 그룹이 독립적으로 운용하게 하자는 이 혁신적인 시도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어제(6일),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노사정 대표들이 모여 발표한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 공동선언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연금 역사가 ‘방치’에서 ‘운용’으로 전환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안도걸과 한정애의 ‘하이브리드 대타협’

이번 합의가 각별한 이유중 하나는 그동안 국회에서 평행선을 달리던 두 개의 핵심 법안, 즉 ‘안도걸 의원안(시장형)’과 ‘한정애 의원안(거버넌스형)’의 정수가 정교하게 버무려진 ‘정책적 결정체’라는 점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닌, 시장의 효율성과 민주적 통제가 절묘하게 균형을 맞춘 결과물이다.

첫째, 안도걸 의원안의 성과인 ‘규모의 경제’와 ‘경쟁’이 수용되었다. 필자가 설계에 참여했던 안도걸 의원안의 핵심 철학은 ‘사각지대 해소’와 ‘시장 경쟁’, ‘가입자의 선택권 강화’이었다.

이번 합의안은 이를 수용하여 현재 30인 이하 사업장에만 적용되는 공공 기금(푸른씨앗)을 300인 이하로 확대하기로 했다. 이는 중소기업 근로자들도 대기업 수준의 복지와 수익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은행·증권·보험 등 민간 퇴직연금사업자가 경쟁적으로 기금을 조성할 수 있도록 ‘민간 개방형 기금’의 문을 열었다. 이는 독점이 아닌 경쟁을 통해 수익률을 끌어올리려는 시장 중심적 해법이 관철된 것이다.

둘째, 한정애 의원안의 성과인 ‘수탁법인’과 ‘노동계 참여’가 거버넌스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계는 퇴직연금의 주인인 근로자가 퇴직연금에서 소외되는 것을 우려해왔다.

이번 합의는 이를 반영하여 한정애 의원안이 제시했던 ‘별도 수탁법인 설립’과 ‘연합형 기금’ 모델을 공식화했다. 더불어 안도걸 의원안의 민간 개방형 기금이라 할지라도 금융회사와의 신탁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수탁법인’을 세우도록 하고, 이사회에 가입자(근로자) 추천 이사를 30%(최소 2명) 이상 포함하도록 의무화했다.

연합형 기금의 경우에는 노사 동수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강력한 의결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는 근로자가 단순한 ‘가입자’를 넘어 ‘주인’으로서 퇴직연금을 직접 감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지배구조(Governance)’라 할 수 있다.

잠재적 위협: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은 다른 그릇이다

물론 환영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합의문에는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 활성화’라는 문구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향후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거대 권력의 시장 독점’이라는 일반적인 우려를 넘어, 근본적인 ‘구조적 위험성’을 가진다.첫째, ‘3층 연금 체계’의 붕괴 우려다. 국민연금은 1층(공적 부조 및 사회보험), 퇴직연금은 2층(사적 소득 비례)이라는 명확히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국민연금은 확정급여(DB)형 성격의 세대 간 부양 모델이고, 퇴직연금은 확정기여(DC)형 성격의 사유재산 축적 모델이다. 기능과 목적이 다른 두 자금을 섞는 것은 연금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단순히 수익률이 높일 수 있다는 이유로 기능을 혼재시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기금 고갈 리스크’의 전이(Contagion) 가능성이다. 주지하다시피 국민연금은 인구 구조상 고갈이 우려되는 기금이다. 반면 퇴직연금은 근로자 개인의 계좌에 쌓이는, 고갈될 수 없는 사유재산이다.

만약 두 기금의 운용이 연계되거나 통합 관리될 경우, 향후 국민연금의 재정 위기가 퇴직연금의 안정성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 리스크에 대한 ‘방화벽(Firewall)’ 역할을 해야지, 함께 불타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선택권’의 착시와 실질적 제한이다. 국민연금이 들어오면 직관적으로는 가입자의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가 보증하는 거대 공적 기금이 시장에 들어오는 순간, 민간 기금들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시장은 공공 주도로 급격히 쏠릴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민간의 창의적 상품들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장기적으로 근로자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제한하는 ‘구축 효과(Crowding-out)’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이 ‘공공기관 개방’이라는 문구는 실제 입법 과정에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남겨진 숙제: ‘운용 시스템’을 설계하라

이번 선언으로 “누가 기금의 주인인가(Who)”와 “어떤 구조로 통제할 것인가(Structure)”라는 정치적·구조적인 합의는 끝났다. 하지만 정작 근로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충분하게 답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7~8%의 수익률을 낼 것인가(How)?”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수익률 정상화와 시장에서 제기되는 정책적 오용 우려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은 ‘정교한 기금운용체계’에 있다. 이제 공은 정치인과 노사 대표의 손을 떠나 전문가들에게 넘어와야 한다.

기금을 감독하는 ‘이사회’와 실제로 자금을 굴리는 ‘운용위원회 및 기금전문운용사’가 어떻게 전문성을 유지하며 상호 견제할 것인가? 독립적인 ‘위험관리’와 ‘성과평가’ 체계는 어떻게 이 시스템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것인가?

이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설계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금형 제도가 또 다른 ‘비효율의 성’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뉴 오디세이’의 항로를 완성해야 한다

노사정은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긴 항해를 위한 튼튼한 배(Ship)와 나침반(Compass)을 마련해주었다. 안도걸 의원안의 ‘시장 효율성’이라는 엔진과 한정애 의원안의 ‘민주적 거버넌스’라는 키가 결합된 이 하이브리드 선박은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역사를 바꿀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나침반만으로는 목적지인 ‘이타카(수익률 7%)’에 도착할 수 없다.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구체적인 항로를 설계하고, 암초를 피하는 기금운용의 묘가 발휘되어야 하며, 이는 전문가들의 몫이다.

이번 합의가 선언문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도약이 되도록, 남겨진 세부 운용 지침(Guideline)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적 양심과 실력이 필요하다. 정치가 그린 지도 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퇴직연금을 국민의 든든한 노후 동반자로 만드는 마지막 퍼즐이다.

글쓴이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대표는 과거 펀드평가사 (주)제로인을 이끌며 한국 자산운용 시장의 투명성을 높인 주역이다. 현재는 한국퇴직연금개발원을 통해 퇴직연금 제도의 구조적 개혁과 기금형 제도 도입을 위한 정책 자문 및 입법 지원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