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적 개헌 아닌 헌법애국주의적 개헌을!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파시즘이 온다(2) 보수세력, 더이상 민주주의 원치않아 이에 민주공화국의 헌정 실서와 핵심가치 지키는 헌법애국주의로 맞서야
기득권 세력은 민주주의가 거추장스럽다
극우 세력의 준동이 심상찮다. 무슨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진 듯한 집회 규모도 만만치 않지만, 주장과 표현은 점점 더 극단화되고 행동도 폭력화되고 있다. 심지어 주류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마저 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거나 옹호하면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파시즘의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탄핵이 인용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된다고 해서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를 얻어 언제 어떻게 민주적 헌정 질서를 교란하고 무너뜨릴지 모른다. 일시적인 대응을 넘어 비상한 경계와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는 줄곧 <보수적 권위주의> 정도의 성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12.3 내란 사태 이후 급격하게 <극우 포퓰리즘>에 경도되고 있다. 보수적 시민들을 친북 친중 반국가세력에 맞서 싸우는 애국 세력으로 결집시켜 정치적 이익을 노린다. 심지어 12.3 계엄령이 정당하고 불가피했다고 강변하는 등 민주적 헌정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려는 <극우 파시즘>의 충동마저 숨기지 않고 있다. 지금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 이 세 경향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특히 한국의 보수에게 민주주의는 이제 더는 몸에 맞지 않게 된 옷이 된 것 같다. 이것은 한국 보수의 사회적 기반인 기득권 세력이 변화된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 탓에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한 이익 방어 압력에 노출된 탓일 터다. 이 세력에게는 지금 가령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분배의 요구를 억누르며 기후 위기 등을 이유로 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게 너무도 절실한 생존 요구가 되는 경쟁 환경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이 세력이 수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란 기껏해야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일 뿐일 테다. 러시아나 헝가리 같은 데서 보듯이, 여기서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되지만,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온전한 보장이 없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교묘하거나 노골적인 탄압이 일상화된다.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떠들어 댄 윤석열이 검찰 권력을 무기 삼아 실제로 추구하고 실천했던 건 바로 이런 비-자유 민주주의인데, 그는 지난 총선 이후 국회의 권력 중심이 반대 세력으로 넘어가자 군대를 동원해 아예 파시즘 체제를 세우려는 폭력적 시도를 감행하다 실패했다. 아마도 이런 실패의 경험 때문에 한국 보수는 다시 권력을 잡더라도 계엄령 같은 극단적인 민주주의 파괴 시도는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부정하고 민주적 헌정 질서의 허점을 파고들어 야금야금 이 질서를 침식시켜 무너뜨리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기울일 것임이 틀림없다. 이들에게는 지금 민주주의가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탓이다. ‘유사-파시스트’ 트럼프가 행정부를 장악한 미국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민주와 함께 공화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절박한 과제는 이렇게 민주적 헌정 질서라는 틀에서 이탈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보수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어떻게 이 질서를 지켜낼 것인가이다. 그들은 지금 부정선거를 외치고 있고 윤석열을 체포, 구속한 사법 시스템의 정당성을 부인하며 탄핵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를 ‘깨부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헌정 질서와 핵심 가치 및 원리를 단호하게 수호하려는 ‘헌법애국주의’(하버마스)로 맞서야 한다.
그러나 이 헌법애국주의는 단순히 지금의 헌정 질서에 대한 어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보수(保守)’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질서가 왜 이렇게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성찰하면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참된 해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민주공화국의 핵심 가치와 원리가 손상되고 헌정 질서 자체가 허물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애국주의는 현행 헌법을 절대화하거나 신성화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 우리의 제6공화국 헌정 질서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물이다. 당시는 전두환 군부 독재체제의 극복이 최우선적인 과제였고, 그 과제는 핵심에서 그동안 독재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고 5년 이상 권좌에 앉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완수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때 독일의 선례를 따라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민주적 헌정 질서를 사법적으로 수호하는 기능을 부여했는데, 이런 정도면 우리 민주주의 체제가 지켜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잘 작동해 왔으며, 우리 사회의 발전과 성숙을 견인해 왔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 체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이 흔히 ‘제왕적’이라고 규정하곤 하는 대통령제의 폐해가 심각했다. 이 문제는 그 핵심에서 행정부 권력이 너무 과도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의 자의적 통치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국회와 사법부의 견제 역시 일정하게 제도화되어 있기는 했지만, 대통령 권력의 과도함과 자의성 앞에 무력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모든 정치 과정이 승자가 독식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대통령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초점을 두고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정당 역시 대통령제의 문법에 종속되어 정책과 정치 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천보다는 적대적 권력투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12.3 내란 사태는 이런 배경 위에서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 체제의 교착 상태가 낳은 파국의 표현이다.
애초 검찰총장 윤석열을 정치로 끌어들이고 대통령으로 만들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검찰통치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 체제를 배경으로 한다. 어떻게든 대통령 권력을 손에 쥐어야만 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국민의힘으로 하여금 한때 이 당을 고사 직전으로 몰고 갔던 검찰 출신 정치 초보자를 끌어들여 당 전체가 그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걸 수용하게 했다. 물론 검찰통치체제는 양극화된 적대주의 정치의 해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의 야만적 사법화를 통해 그나마 남아 있던 (타협과 조율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마저 아예 질식시켜 버렸다. 그 결과 정치권의 교착 상태는 심화하기만 했고, 급기야 대통령 윤석열은 계엄령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아예 민주주의라는 틀 자체를 깨버리려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이 제6공화국 헌정 질서는 민주주의의 자기파괴적 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제6공화국 헌법의 설계자들은 단지 민주적 경쟁이라는 계기(곧 대통령 직선제)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이 경쟁의 틀을 잘 설계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가 그 내부에서 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무슨 자동 기계가 아니다. 승자독식을 원리로 하는 민주적 경쟁이 격화하면, 경쟁 참여자들은 승리에만 집착하여 심지어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토대를 허물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의 헌정 질서는 이 민주주의의 자기파괴적 덫에 걸렸다.
민주적 경쟁은 무슨 ‘제로-섬 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민주적 경쟁이 저 자기파괴적 덫을 피하려면, 그 경쟁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세력이 함께 이루어 낸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가 생존과 자유를 위한 나름의 몫과 목소리를 보장받은 상태에서, 참된 공동선을 찾아 그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생산적 경쟁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것을 우리는 ‘공화’의 원리라 할 수 있는데,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아주 절박한 ‘공화화’의 과제 앞에 있다. 이 과제는 결국 이런 방향의 공화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헌정적 틀을 새롭게 설계함으로써만 완수될 수 있다.
정략적 개헌 논의를 넘어서야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일종의 ‘연성 내전(soft civil war)’ 상태에 빠져 있다. 윤석열의 내란이 이 내전을 격화시킨 건 틀림없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견을 가진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과 혐오가 진작부터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치는 인구 절벽,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 AI 시대의 도래, 기후 위기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그 어떤 생산적인 해법도 내놓지 못한 채 그저 상대를 저지하고 비난하며 거부하는 데만 몰두해 왔다. 이래서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없다. 민주적 헌정 질서의 ‘리셋’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곳곳에서 개헌에 대한 요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건 일단 반가운 소식이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이제 제6공화국 헌법의 근본적 한계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진영을 막론하고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고 있는 개헌 요구들은 많은 경우 개헌 논의를 앞세워 12.3 내란의 범죄성을 가리려 하거나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 보겠다는 얄팍한 정략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필요한 건 내란을 완전하게 진압하고 혼란에 빠진 민주적 헌정 질서를 지켜내기 위한 헌법애국주의적 실천이고, 그 출발점은 일단 안정적인 정권교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복잡한 개헌 논의를 단기간에 밀실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독점해서도 안 될 일이다. 개헌은 새 정부 수립 이후 많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깊은 숙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정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공화적 헌정질서를 서둘러 열어야 한다는 과제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누가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지가 다음 대선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략적 개헌 논의를 경계하고 구체적인 개헌안은 시민과 정치권이 함께하는 숙고에 맡겨 두는 게 마땅하지만, 새로운 헌정 질서의 기본 틀과 방향만큼은 분명히 해두는 것도 꼭 필요하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권력 구조일 테다. 여기서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집중시켜 행정부 전체를 그의 자의적 통치 아래 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통령 4년 중임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식의 요구는 문제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런 방향의 개헌은 자의적 통치를 임기 동안 보장받는 제왕적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5년에서 8년으로 늘이는 효과만 낳을 수도 있다.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거나 아예 대통령제를 의회(중심)제(내각제)로 바꾸어야 한다. 곧 분권을 통한 균형과 상호 견제의 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화적 민주주의의 요체다.
여기서 이번 내란 사태를 겪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설사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극우 세력이 정치적으로 부상하더라도 그 세력의 작용 범위를 제한할 수 있게끔 헌정 질서를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보듯이 극우 세력이 보수 정당을 장악한 상태에서 집권할 경우 민주적 헌정 질서 전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결선투표가 있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나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극우 세력의 정치적 부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전하게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헌정 질서의 또 하나의 초점은 이 질서를 어떻게 설계해야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자기파괴의 동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데 있다.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국회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지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우리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단순다수결 의회 구성 제도와 연결되어 적대주의적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지금과 같이 지역구 중심의 단순다수결 선거제도로 국회를 구성할 경우 양당체제가 귀결된다는 건 거의 필연적인 법칙이다(뒤베르제의 법칙).
그래서 오랫동안 독일처럼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드셌지만, 한국에서는 위성 정당을 막지 못해 오히려 적대적 양당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만 낳았다. 이런 전제 위에서는 문제해결적 정치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해법이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새로운 헌정 질서의 틀을 찾아보고자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