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이 온다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내란 배후, ‘폭력적 파시즘’의 극우 트럼프처럼 극우의 재집권 있을 수도 정권교체 넘어 특별한 ‘민주주의 지키기’ 기층 대중 위한 새로운 정치노선도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부대 시위.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부대 시위. 사진=연합뉴스

‘정권교체’로 끝날 일이 아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 전개다. 위헌, 위법이 너무도 명백한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지지하는 국민이 거의 40%에 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윤석열 탄핵을 기각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는 여론도 그만큼 높고, 내란을 옹호하는 국민의힘 지지율은 어떤 조사에서는 민주당을 앞서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단지 ‘보수 과표집’의 결과일 뿐이라고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지만, 여론의 일정한 경향성 자체는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여론 흐름은 곧 바뀌리라 믿지만, 우리가 피흘려 만들고 지켜온 민주적 헌정질서를 허물려 했던 내란 사태를 긍정하는 국민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다.

여론 지형이 이런 식으로 형성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민주적 헌정질서를 파괴하려 한 내란 사태가, 민주주의 수호 세력 대(對) 파괴 세력의 대결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통상적인 진영 대립 문제로 정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자신의 내란 범죄를 정치적 선동으로 덮으려는 윤석열과 그에 발맞추려 극우화하고 있는 국민의힘이 있다. 이 국민의힘은 언제든 다시 재집권할 수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주축 양대 정당 중의 하나이고, 나름대로 굳건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만큼 상황은 실로 엄중하다.

지금의 여론 지형에서 다음 대통령은 다시 국민의힘 후보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번 내란 사태가 단순히 알코올과 극우 유튜브 방송에 중독된 윤석열 개인의 망상장애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걸 놓치면 안 된다. 지난 서부지법 ‘1.19 폭동’에서 확인되었듯이,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일탈로만 보였던 내란의 배후에는 언제든 폭력적 파시즘을 실천하고 지지할 수 있는 거대한 극우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극우는 단지 ‘태극기 부대’ 노인만이 아니라 청년 세대를 포함한 일반 대중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윤석열 탄핵이 인용되고 민주당 후보가 다음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내란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에서 ‘의사당 난입 폭동’이라는 사실상의 내란을 선동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더 강화된 지지기반과 인적 자원을 갖추고 권좌에 복귀했듯이, 유사한 상황이 한국에서도 펼쳐질 수 있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복귀하는 일이야 없겠지만, 더 황당한 극우 이념으로 무장한 극우 세력이 다시 집권하여 우리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무너트릴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심각한 생존위기 앞에 서 있다. 단순한 ‘정권교체’가 문제가 아닌 상황이다. 파시즘이 온다. 대선을 둘러싼 민주당 내부의 집안싸움도 한심하지만, 중도를 공략하겠다고 정책 우경화 행보에 나서는 이재명 대표의 모습도 아쉽다. 2017년의 탄핵 국면이 다시 한번 순탄하게 반복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의 민주진보진영은 민주적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극우 세력에 맞서 이 질서를 지켜내고 성숙시켜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있다.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발본적인 인식전환과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때다.

한국판 극우 포퓰리즘?

돌이켜 보면, 한국 정치에서 극우 파시스트 세력은 늘 주류였다.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체제에서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맹목적으로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극우 세력은 ‘보수’라는 가면을 쓴 채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정권’을 민주 세력에게 내준 적은 있어도, 사회의 실질적 통치 권력은 계속해서 장악하고 있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도 검찰과 사법부의 판검사들이나 행정부의 많은 고위 관료들은 직,간접적으로 그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주류 언론, 재벌, 극우 개신교 세력 등이 그 세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세력이 민주주의적 보수세력으로 탈바꿈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민주화 이후 이 세력은 민주적 헌정질서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들이 그걸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이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 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이를 저지하며 정치적으로 응징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이라는 일탈을 범했을 때도 압도적 여론으로 탄핵에 찬성하며 이 세력을 정치적 궁지로 몰았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바로 이 국민들 상당수가 극우 세력의 내란 옹호 선동에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동안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선, 우리는 글로벌한 상황을 봐야 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정적 결과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민주주의 전반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 한국의 상황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소수의 엘리트가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능력주의적 과두정’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배제되고 빈곤과 경제적 불안정 및 ‘사회적 무시’ 때문에 고통 받는 기층 인민들이 극우 포퓰리즘에 경도되고 있다. 이런 세계적 경향이 한국 사회에서도 얼마간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서구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기층 인민들보다는 고소득 및 고학력 중산층의 이해관계와 요구에만 반응하며 ‘브라만화’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의 민주당 정부 역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집값 폭등과 같은 민생 불안정, 자영업자들과 청년 세대의 고통을 방기하는 등의 문제를 드러내는 바람에 결국 윤석열을 불러들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노인 세대가 극우 개신교에 포섭되고 불투명한 미래 전망 때문에 부유하는 많은 청년 세대가 신천지 같은 이단 개신교에 흡수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덧붙여 많은 청년 남성들이 SNS 알고리즘의 부정적 영향에 노출되고 반-페미니즘의 기치에 휩쓸리며 극우화되고 있는 것도 글로벌한 현상의 일부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서구 선진국들과 달리 이주민 문제 같은 게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나 급격하게 변모한 세계 경제 환경에서 중국이 부상하고 그에 따라 경쟁이 격화하면서 포항제철이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지하는 등 한국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다거나 하는 상황은, 서구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외부로부터 침투하여 우리의 번영을 방해하는 ‘중국이라는 정치적 적’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을 침략하려는 중국의 음모에서 시작된 부정선거와 그에 결탁한 좌파 세력’ 같은 유의 극우 담론이 형성되어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고유한 문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한국의 승자독식형 단순다수결 선거 제도에 따른 의회 구성과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낳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가 12.3 내란의 가장 결정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이 체제에서 심화된 적대주의 정치는 정치적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만 여기게 하는 정치적, 문화적 태도와 경향을 심화시켰고, 그 배경 위에서 윤석열은 감당할 수 없는 여소야대 국면에 직면하자 모든 문제를 ‘일거에 척결하는’ 방향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지지했던 대중들은 바로 그런 적대주의에 영향을 받아 무비판적으로 파시즘에 휩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의 대통령은 사실은 제왕적이지 않으며 미국이나 프랑스의 대통령보다 권력이 제한적이라거나 또 사실은 국회에 의해 대통령의 권력 행사가 충분히 견제되고 있으니 결국은 문제가 박근혜나 윤석열 같은 대통령 개인의 문제라는 식의 논의는 내 생각에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 진짜 문제는 행정부가 대통령 한 사람의 자의적 통치에 휘둘린다는 대통령제 자체의 고유한 문제다. ‘권력 분립’의 논리로 이 행정부의 자의적 통치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된다.

이 대통령제는 정당의 ‘대통령제화’를 부추겨 정당 정치를 왜곡하고, 모든 정치 과정을 대통령 권력 획득과 유지라는 목표에 종속시킨다. 민주당에서 관찰되고 있는 ‘과두제의 철의 법칙(iron law of oligarchy: 아무리 민주적인 조직이라도 조직운영의 “전략적, 기술적 필요상”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과두 지배가 필연적인 철칙으로 나타난다는 이론-편집자주)’이나 ‘개딸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대통령제가 단순다수결 의회 구성 제도와 연결되어 있어 적대주의적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양극화된 정치 체제에서는, 윤석열의 경우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예에서도 보듯이, 주류 보수 정당이 극우에 포획된 채로 집권하면 민주주의 자체가 근본적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지난해 8월 영국에선 한 어린이 댄스 교실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범인이 무슬림 망명 신청자라는 거짓 정보에서 시작된 극우 폭력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영국에선 한 어린이 댄스 교실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범인이 무슬림 망명 신청자라는 거짓 정보에서 시작된 극우 폭력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사진= 연합뉴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지금 민주당이 암묵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그저 단순히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데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된다. 최근 여론 조사의 특이 동향은 단순히 보수과표집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확인한 것은 우리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취약성이다. 글로벌한 경제 환경을 포함하여 우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들과 내부의 민주주의의 적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출신 독일 법학자 뢰벤슈타인(Löwenstein)은 민주주의가 자신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 파시스트 같은 적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의 원리 적용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투적 민주주의(militant democracy)’를 제안한 적이 있다. ‘방어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은 이후 독일에서 ‘위헌정당 해산’ 같은 조치로 현실화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과정에서도 차용되었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파시즘의 도래에 맞서 이 개념을 신중하게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물론 이 개념은 쉽게 악용될 수 있다. 사실 박정희의 유신 계엄이나 윤석열의 12.3 계엄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 적들을 비상한 방법으로 척결한다는 식의 방어적 민주주의의 논리를 도용한 것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의 경우에도 헌법재판소는 ‘위헌성’에 대해 지나치게 자의적 잣대를 적용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특정 정치 세력의 민주적 권리를 근본적으로 제한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새롭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민주적인 방법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분명한 이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에는 우선, 가령 극우 유튜브에 대한 감시와 통제, 의도적 ‘가짜 뉴스’에 대한 처벌, 극우 인사들의 공적 혐오 발언 등에 대한 폭로와 비판 같은 조치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들은 자칫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시비에 노출될 수 있기에, 민주적 헌정 질서의 수호에 대한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절제되고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밖에 자라나는 세대와 시민들에 대한 민주시민교육도 빠트릴 수 없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무시당하고 소외된 기층 대중들이 극우 파시스트들에게 포섭되지 않도록 할 포용적 경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려는 새로운 정치 노선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민주적 헌정질서 자체가 파시즘을 견딜 수 있도록 재설계되고 재정비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도층의 지지를 얻겠다면서 금투세를 폐지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거나 개헌 문제를 무턱대고 미루기만 하려는 민주당의 정책 방향은 너무도 안이하게만 보인다. 이런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자.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공정의 배신>, <공화주의자 노무현>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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