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을까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정보를 왜곡하는 다양한 인지적 편향들 정권 입맛에 의해 규정되는 가짜뉴스 열린마음으로 인식의 ‘왜곡과 가짜’ 피하길

▶ 유튜브로 칼럼 듣기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같은 사건들을 보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이나 믿음이 서로 다른 경우가 흔히 있다. 보는 것은 믿음을 만드는 것인데(백문불여일견, Seeing is believing), 여러 이유로 우리는 한 장면에서 각자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믿음을 갖게 된다. 왜 그렇게 될까? 이 문제를 인지과학적으로 풀어보자.

선택적 자극 수용

공간에는 수많은 전자파가 돌아다닌다. 라디오 방송만해도 10여 개는 된다. 그렇지만 라디오의 채널을 선택하면 한 방송국의 신호만 잡는다. 채널 선택은 라디오를 극도로 편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편향된 라디오는 한 주파수의 신호에만 공명하여 그것만을 증폭하고 다른 신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휴대전화는 같은 주파수의 신호 중에서도 그 기기를 향하는 코드를 담고 있는 신호에만 반응한다. 편향성 또는 선택성이 훨씬 높아진 것이다. 이런 선택성이 필요한 것은, 많은 신호들 중에서 특정한 것에만 반응해야 시스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각도 자극 선택성을 강하게 갖는다. 자극 선택성은 진화의 과정에서 주어진 능력이다. 세상은 자극으로 가득 차 있는데, 생존에 필요한 자극에 선택적으로 주목해야만 환경에 맞는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사자가 나타났을 때 사자가 아닌 가까이 있는 영양과 얼룩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면 우리 조상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적으로 주목되도록 만드는 자극의 특성을 현저성(顯著性, salience)이라 한다. 주어진 자극들 중 어떤 것이 현저한 것이 되는지는 자극 자체의 특성뿐만 아니라, 자극을 수용하는 사람의 과거의 경험이나 내적인 상태 등 수용자의 특성도 관계된다. 그래서 같은 사고를 목격한 두 사람의 증언은 서로 다르다. 사고 현장에서 현저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자극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증인이 당시 배가 고팠었다면, 현장에 고기 굽는 냄새가 났었다는 것을 더 잘 기억할 것이다. 현저성 높은 자극은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바뀌지만, 내 뜻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황을 중립적-객관적으로 지각했다고 인식하겠지만, 실제로 내게 주어진 자극은 이미 선택적-편향적인 것이다.

선택성은 필요한 것에 더 잘 접근하도록 해주지만 그 뒷면에는 선택된 것 이외에는 보지 못하게 한다는 문제가 있다. 집중해서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 지하철의 도착역 안내방송은 현저성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목적지를 지나친 뒤 휴대폰에서 잠시 눈을 떼었을 때야 비로소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음을 알게 된다.

자동적 왜곡

나의 눈(망막)에 비쳐진 영상이 그대로 나의 시각 체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망막의 영상을 뇌가 받아들인 뒤부터 내가 인지(“내가 보는 것은 OO이다”라고 깨달음)할 때까지 복잡한 뇌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은 내 뜻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뇌에는 이미 “세상에는 이러이러한 대상들이 있다”는 데이터베이스(게슈탈트, Gestalt)가 존재한다. 어려서부터 자극에 반복 노출되었던 경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인데, 나는 전혀 의식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눈으로 본 것은 이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가공된 뒤에 비로소 내 의식에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나는 익숙한 것을 보게 되지만, 실제가 아닌 왜곡된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착시 현상이다.

카니자의 삼각형(그림)에는 예각의 모서리들만 있을 뿐 실제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삼각형이 있는 것으로 본다. 모서리 세 개면 삼각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게슈탈트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왜곡은 인지적 문제가 있는 일부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더구나 카니자의 그림에서 아무리 삼각형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나는 강제로 삼각형을 보게 된다.

카니자의 삼각형.
카니자의 삼각형.

이런 과정은 내가 보는 세상을 알기 쉽게 만들어주므로 매우 유용하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신호들은 잡음이 많으므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잡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잡음 제거는 원래의 신호를 왜곡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잡음 제거는 신호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하므로 의식적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간간히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있어도 모르고 넘어가는데, 문법 게슈탈트에 의해 글이 자동적으로 교정된 상태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상당히 유용한 기능이지만 정보는 왜곡되고,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정보를 인지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분명히 보았는데 그것은 주어진 그대로가 아닌 왜곡된 것이며, 나는 그것이 왜곡된 것임을 전혀 알 수 없다.

인지적 조화의 추구

정보 수용 단계를 지나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의거해 어떤 정보를 평가하는데도 이와 비슷한 왜곡 또는 단순화가 일어난다. 우리 인지 구조는 일관성을 추구한다. 내가 보는 것과 나의 믿음과 나의 행위는 서로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인지 부조화 이론).

인지 부조화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편한 상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보는 것은 왜곡되고, 믿음은 편협해지고, 행위는 그럴듯하게 합리화된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접하는 경우에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틀에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버리는 것이다. 확증편향은 이런 과정에 의한다. 내 의지가 개입하지만 명시적이지 않아서, 스스로는 편향성을 모른다. 내가 A가 아닌 B를 믿고 싶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A보다 B가 더 편하고 마음이 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뜻이 개입하는 과정이므로, 조금만 냉정하게 성찰한다면 B보다 A가 옳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고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신념 체계 전체의 틀이 흔들리게 된다. 인생은 그렇게 힘들게 살기보다는 익숙한 대로 사는 게 좋다. 그래서 나는 내적 갈등 없이 일관된 인생을 살지만,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강한 부조화와 갈등이 벌어진다.

세뇌

유튜브나 뉴스 포털의 개인별 맞춤 알고리듬은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내가 보고싶어 하는 정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검색어를 입력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정보를 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편향된 정보가 집단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뿌려지고 다른 정보를 접할 기회가 차단된 상태라면 문제의 질은 달라진다. 정보가 편향적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방적 정보를 반복 주입함으로써 사람의 믿음을 바꾸는 것을 세뇌(洗腦)라 한다. 세뇌당한 사람은 그 믿음이 합리적인지를 성찰할 능력을 잃는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교주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의 정신병리다. 망상에 근접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 공급자가 다른 정보를 통제하고 자기 정보를 독점적으로 뿌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폐쇄적 종교집단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정권‘이다. 뉴스에도, 영화관 광고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면 평범한 국민들은 그 정보가 사실이라 믿게 된다. 권력이 국민들을 세뇌한 것이다.

더구나 그 정보가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잠재적인 시기심이나 혐오감을 자극하는 내용이면, 특정 집단이 악마라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했던 일이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하고 있는 일이다.

가짜 뉴스, 의도적이라 의심되는 것

가짜 뉴스가 화두가 되어, 새로 임명된 언론사 사장이 그동안 자기 회사가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바도 있지만, 가짜 뉴스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가짜 뉴스는 “정보가 사실에 부합하는가”와는 다른 측면의 문제다. 기자가 사안을 체계적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부분적인 정보만을 얻어내고 그것을 전체라 믿을 수 있다. 일부러 어떤 부분을 안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현실 중 일부만이 기사에 제시되는데, 맥락이 생략된 정보는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가짜 뉴스가 된다. 예컨대 정부가 국민들을 세뇌하였다는 배경은 숨긴 채, “국민 대다수가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니 이 정책은 옳은 것”이라는 기사가 떳떳하게 보도된다. 그리고 이 가짜 뉴스는 세뇌된 국민들의 편향성을 강화시키는 정보로 정부에 의해 활용된다.

한편, 수사의 대상이 되는 가짜 뉴스들을 보면, 가짜 여부는 “기사 작성자가 정부나 대통령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 판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기사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진짜 뉴스가 된다. 의도를 평가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도덕의 영역이고, 도덕은 진짜냐/가짜냐가 아닌 좋으냐/나쁘냐를 따지는 것이다. 의도에 의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가 판정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상식이 가출한지는 오래된 것 같다.

가짜 뉴스, 의도적이 아닌 것

분석할 가치가 있는 것은 작성자의 의도와 다르게 결과적으로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는 경우다. 기자도 사람인지라 아무리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더라도 누구나 갖고 있는 편향성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취재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기사를 작성할 때도, 기자의 평소 믿음이 반영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사 내용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작성자는 자신의 편향적 태도가 반영된 기사임을 깨닫지 못한다. 인지 부조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기사 작성 중 사실과 자기 견해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면, 독자에게 혼란을 초래하기 쉽다. 예컨대 “정신질환자 중에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견해를 가진 기자라면 범죄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용의자의 정신병력에 특별하게 관심을 가질 것이고, “이 용의자는 정신질환 병력이 있다”는 정보가 담긴 기사를 쓰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은 독자는 “정신질환자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구나”라는 내용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카니자의 삼각형처럼, 삼각형을 그린 것은 아닌데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삼각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잘못된 정보를 얻은 것이므로, 이 뉴스는 가짜 뉴스가 된다.

수용자의 태도

가짜 뉴스만을 탓할 수 없는 것은, 뉴스 수용자도 수동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경회로와 무의식적 인지기능과 인지적 조화에 대한 추구 등 모든 인간적인 것이, 정보를 선택적으로,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용하도록 만든다. 확증편향을 갖는다면, 다양한 뉴스들이 섞여 주어졌을 때 그 중 자기 신념에 부합하는 것만을 고를 것인데, 뉴스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와는 무관하다.

편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 자신과 인지적으로 부조화인 견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기존 견해와 새로 접한 견해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 새 견해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인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때는 인지 부조화도 생기지 않는다.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 두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능해지면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해진다. 대화가 비로소 진정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를 조각 내고 있는 다양한 갈등들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고, 해결을 위해 뜻을 모으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글쓴이

강웅구 서울대 의대 교수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