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죠”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수상 불발 아쉬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미나리’는 이민史, 이 영화는 이민者 이야기 나영과 해성, ‘한국’의 인연 이어가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는 없지만, 똑같은 순 없으니...
영화 ‘미나리’와 대비되는 이민자 이야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 미국인 셀린 송 감독이 만든 자전적인 영화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미나리>를 떠올리게 된다. 두 영화는 어린 시절, 아메리카에 이민 온 주인공의 정서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미나리>가 한국에서 거대한 땅으로 이주한 가족을 통해 환경에 맞서 싸워야 하는 힘든 여정, 그리고 가족의 힘을 보여주는 이민자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민이라는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달라진 두 개인을 경유하면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남녀 간의 보편적인 정서까지도 담아낸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한국어로 옮기자면 ‘전생’인데 한국어로 발음했을 때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패스트 라이브즈’와 ‘전생’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색한 차이가 이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자연스럽다.
두 사람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쓰는 언어도, 행동도 어색하다. 여자 주인공의 한국 이름, 문나영은 로라 문으로 바뀌었고 그녀가 쓰는 한국어는 어색하다. 나영은 ‘육체적’이라는 자연스런 한자어 대신 ‘몸적’이라는 부자연스런 단어를 사용한다. ‘당근’이나 ‘또라이’, ‘장난 아니지’ 같은 익숙한 말도 나영의 억양으로 발음됐을 때 느낌은 다르다. 그래서 서툰 한국어 속에서 이민자가 가졌을 법한 낯선 느낌이 더 잘 전달된다. ‘어색한 자연스러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줄곧 한국에서만 살아왔던 남자 주인공 해성의 한국어도 그녀를 닮아가듯 때로는 어눌하고 자연스럽지 않게 들린다. 해성은 자신의 감정을 어떤 언어로도 설명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모호함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은 “보고 싶었어”라든가 “와, 너다”, “말도 안 돼” 같은 짧고 간단한 한국어 문장을 통해 표현된다. 나영이 남편과 나누는 대화는 영어이고 해성과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다. 대신 나영이 해성을 바라보는 눈빛은 훨씬 더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나영과 해성은 기질적으로 다른 사람이고 서로를 향한 감정 역시 동일하지 않게 느껴진다. 진취적인 나영은 초등학교 때부터 노벨 문학상을 꿈꿨고, 해성은 나영에게 밀려 만년 2등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과는 달리, 에너지 넘치는 모습의 나영을 좋아한다. 나영이 원하는 목표는 분명하게 언급되는 반면 해성의 꿈은 언급되지 않는다. 해성을 남겨두고 이민을 떠났을 때처럼 12년 후에 온라인으로 만남이 이뤄졌을 때도 먼저 해성을 떠난 쪽은 나영이었다. 나영에게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영의 그런 기질을 알기 때문에 해성은 “한국은 너에게 너무 좁아”라고 말한다.
해성이란 존재는 변함없이 늘 한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분명하지만, 때로는 나영보다도 모호해 보인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건지 아닌지,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다. 나영과는 달리 주도적이지 않고,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해성을 나영은 ‘한국 남자답다’고 표현한다. 자신과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방식을 내세우거나, 고집하지 않는 점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만든다.
나영은 해성과 관계를 ‘인연’으로 설명한다. 영화에서 말하는 인연은 정확히 말하자면 남녀 간의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인연, 사랑, 전생이라는 단어는 이민자로서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나영이 아서와 결혼한 것은 작가이면서 이민자인 자신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인 아서와 어릴 적 남자친구였던 해성을 향해 얽혀 있는 나영의 감정선들은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이기도 한 나영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는, 경계선을 밟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특유의 정체성이 있다. 그런 정체성을 인연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사랑으로 표현한 셀린 송 감독의 재능이 돋보인다.

오래된 인연, 그리고 짧은 이별
나영의 엄마가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자, 해성의 엄마는 “한국에서 쌓은 걸 버리고 왜 이민을 떠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그때 나영의 엄마는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죠”라고 답한다. 인연도 그 중 하나다. 남녀 사이에서 한 가지 인연을 택하려면 다른 인연은 버려야 한다. 나영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잔여 감정을 인연이라는 말로 다스린다.
술집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첫 장면에 담은 선택 역시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은 셋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대계인 남편 아서와 나영이 붙어서 앉아 있고 약간 떨어져서 해성이 앉아 있다. 나영은 아서 쪽은 거의 쳐다보지 않고 해성만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나영과 해성은 바라보지만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 관계이며, 나영은 남편인 아서와 같은 편에 있지만 둘 사이에는 공유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영이 해성과 만났을 때 아서가 약간의 경계를 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서는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해성과 나영처럼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순도 높은 기억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영과 아서는 같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고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해성과는 그런 대화가 불가능하다. 서로의 관계는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없기 때문에 미래도 없지만 과거의 내가 성장해서 현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영은 해성에게 말한다. “니가 알고 있는 나영은 그때 한국에 두고 왔어. 그렇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야.”
해성을 배웅하러 가는 마지막 시퀀스가 이 영화에서 나영과 해성의 감정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다. 우버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영은 “금방 오나?”라고 말하고 해성은 “2분”이라고 답한다. 택시가 오기까지 2분 동안 두 사람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본다. 우버가 왔을 때 당황하는 나영의 눈빛, 해성을 보낸 뒤 걷는 나영의 발걸음, 집 앞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서를 보고 터지는 눈물은 오히려 위안을 준다. 술집에서 의연한 표정으로 해성과의 관계를 설명했던 나영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드디어 밖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 그리고 뭔가를 얻는 대신 잃어야 하는 어떤 것은 가슴에 남는다. 이 영화가 단지 나영과 해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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