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영화를 볼 권리를 위해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전주 영화제에서 만난 신개념 영화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시리즈 배우의 움직임을 최소화한 영화 오히려 배경과 사운드는 살아나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할 이유 일깨워
‘범죄도시’가 80% 점유한 영화관
영화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영상 매체는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영상은 늘 우리 손 안에 있다. 그래서 오히려 영상에 대해 무디어졌다. 어떤 영상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신기하지 않고 어떤 특수효과도 초기만큼 관객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바뀌는 장면들과 긴장감 넘치게 짜인 서사를 관객은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이 즐길 뿐이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어떤 지루함도 관객은 참지 못한다. 그런 관객의 성향에 맞춘 영화들이 영화관의 80%를 점유하고 있어서 다른 영화를 보고자 하는 다른 관객의 선택권마저 앗아가고 있다.
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양하다. 영화를 보면서 치유를 받았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이들이 영화에서 얻는 것은 단순한 재미와 시간보내기가 아니다. 가끔 영화관에서 소리죽여 흐느끼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그렇게 슬픈 영화가 아닌데도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갑자기 감정이 올라오는 경험을 해본 적이 다들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는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만들고, 평상시에 들리지 않았던 타인의 목소리, 그리고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만들고,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한다.
황금사자상 수상 감독의 특이한 영화
이번 전주영화제에 초청받은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시리즈’는 가장 특이한 영화다. <애정만세>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차이밍량은 기자회견에서 이 시대에 영화관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현재의 트렌드와는 완전히 반대로 설명해 관심을 끌었다.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 10편 전작이 전주영화제에서 최초로 모두 상영됐다. 조금만 지루하고 속도감이 떨어져도 채널을 돌려버리는 시대에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이 모두 매진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행자 연작은 차이밍량과 이강생 배우 둘이서 함께 만든 영화다. 이강생 배우는 붉은 색 행자옷을 입고 고개를 매우 깊게 숙인 채로 바닥만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화면이 정지되었는지 착각할 정도로 한 발을 땅에서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딛는 시간이 10초 이상 걸린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자체가 고행일 정도다.
10편을 찍는 동안 차이밍량 감독은 이강생 배우에게 보폭이 안정적이고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고집을 피웠으며 매번 찍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강생 배우는 행자 연작에 출연하면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일본에서 촬영할 때는 영하 2℃의 철판을 맨발로 걷기도 했다. 마르세이유에서 촬영할 때는 진짜 행자인 줄 알고 돈을 주는 사람도 있어서 촬영을 망치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주인공의 느린 움직임, 배경은 더 집중되고
영화를 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느낌을 받게 된다. 특이하게도 행자의 움직임, 숨소리 너머로 주변 환경이 강하게 느껴진다. 행자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거친 맨발이 먼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붉은 색 옷자락이 먼저 들어오기도 한다. 붉은 옷의 행자가 프레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도 길고 느린 발걸음을 따라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행자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도 매우 길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사운드, 다른 사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에 오히려 집중하게 된다. 예를 들면 차의 경적소리, 담벼락의 빈 공간에 놓여 있는 밥솥에서 칙칙 거리면서 증기가 올라오는 모습과 밥이 되어가는 소리, 그리고 음원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소음들이 내가 영화관 안에 있는지, 아니면 같은 프레임 안에서 행자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 현실과 스크린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관객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만든다.
행자 연작에서는 배경이 다양하게 바뀌지만 행자의 모습과 행동은 항상 똑같다. 행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걷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행동의 변화도 없다. 배경은 대도시 한복판, 모래 위, 흰색 계단, 허름한 다가구주택의 낡은 계단, 골목, 공사장 등 세상 속 다양한 모습이다.

“이제 관객도 달라지길 바란다”
기자회견에는 차이밍량 감독과 행자 역을 했던 이강생 배우가 참여해서 촬영과정과 영화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연작 10편은 1년에 한편씩 10년에 걸쳐 촬영됐는데 첫 편을 찍을 때만 해도 10편까지 계속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감독은 밝혔다. 홍콩에서 두 번째 작품을 촬영했을 때, ‘호르몬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냐’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만큼 낯선 영화다. 차이밍량 감독은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가 주가 되는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지적하면서 “이제 영화관도 개혁이 필요하고 관객도 달라지길 바란다”고 했다.
현재 영화관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객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집에서도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영화관까지 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영화들의 장르가 정해지는 느낌이다. 큰 스크린과 사운드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역동적인 대작일 경우에만 영화관을 찾는다. 예를 들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듄 시리즈, 범죄도시 시리즈는 나올 때마다 영화관 회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흥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가 내용이나 장르에 갇혀 있게 되면 새롭게 나아가는데 구속이 된다”고 말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할 이유는 ‘이미지’
그의 영화는 정반대다. 감독은 이런 영화를 영화관에서 봐야 할 필요에 대해 이야기했다. 휴대폰이나 집에서 작은 화면과 사운드로 행자 같은 영화를 본다면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영화 속에 빠져들 수 없다. 서사가 없고 천천히 움직이는 이미지와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 사물의 소리만 있는 행자 연작은 행자의 숨소리, 그의 특이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행자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바람까지 느끼게 한다. 지루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차이밍량 감독은 미술관에서 한 그림을 한 시간씩 감상하는 경우를 예로 들면서 영화의 이미지도 그렇게 감상했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스토리텔링에 집착해, 영화의 이미지에 있는 강력한 힘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행자 연작 11회는 전주에서 촬영하기로 기자회견장에서 즉석으로 결정됐다. 그 계획이 실행되어 전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세계에 알려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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