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의 혁신을 이끈 로맨티시스트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프랑스 음악의 별 - 엑토르 베를리오즈 실연의 고통을 음악으로...’환상교향곡’ 표제음악 적극 창작, ‘고정악상’ 기법 시도 낭만주의 예술적 이상 구현한 작곡가
해부실의 공포가 음악가의 길로 떠밀다
의대 정원확대 정책이 당국과 의사협회 간에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면서 애꿎은 환자들만 속을 태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절대 아프면 안 돼!, 병원 갈 일 만들지 말자!’ 다짐까지 하게 되는데, 이 의료공백 사태를 접하며 젊은 시절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해부학 실습의 끔찍함을 견디지 못해 음악가로 진로를 바꾼 19세기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고액의 수입, 전문직으로서의 권위 등 매력 있는 업(業)이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고, 긴 시간을 투자하는 등 남보다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처럼 의사는 무엇보다 적성에 맞는 일이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Hector Berllioz, 1803~1869)는 리옹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박학다식한 아버지는 예민하고 열정적인 기질과 함께 음악과 문학에 뛰어난 감수성을 보인 아들을 집에서 직접 가르쳤고, 가업을 잇게 하려 아들을 파리의 의과대학으로 보냈다. 스물한 살에 의대의 학부를 수료했지만, 의과대학생 시절의 베를리오즈는 수술과 해부 실습에서의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가 회고록에 쓴 당시의 충격적인 장면이다.
“그 으스스한 시체 안치소에 발을 디딘 순간 널브러진 시신들, 인체에서 잘려나간 팔과 다리, 쪼개진 머리통,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 눈에 들어왔다. 발 밑에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핏빛 오물 웅덩이에서는 참새 떼가 살점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석에 모여 있는 쥐들은 아직 피가 흐르는 시신의 일부를 정신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순간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냅다 창문을 넘어 저승사자가 뒤쫓아 오는 양 집으로 줄달음을 쳤다. 그 충격에서 헤어나는 데 스물네 시간이 걸렸다. 그 후로 나는 인체구조, 해부, 의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고, 내게 강요된 의사라는 직업을 좇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다짐했다.”

해부실을 뛰쳐나온 이후, 그는 병원보다는 오페라 극장을 더 자주 찾게 되었는데, 특히 당시에 글루크의 오페라에서 받은 감동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얻어 스물셋의 나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부모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 극장 합창단의 객원 단원, 신문에 글을 쓰는 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야 했다. 음악가로서 그는 새로운 것들, 새롭게 해야 할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졌던 혁신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사실 이 인물뿐 아니라, 의식 있는 작곡가들은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이라는 최고봉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분투하며 ‘새롭게 해야 할 것들’을 찾아 나서야 했던 시대였다.
베를리오즈는 특히 심포니오케스트라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었다. 당시 60명 정도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100명, 120명 규모의 장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작품에 대한 구상을 교수들과 동료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는데, 주위에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훈련된 단원들이 파트별로 연습하고, 지휘자가 균형감 있게 잘 컨트롤 한다면 분명 힘 있는 음향을 낼 수 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오케스트라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을 지낸 고향에서는 피아노 레슨을 받을만한 데가 없었기에 피아노를 모르는 채 작곡을 공부한(매우 드문) 경우였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피아노 작품을 한 곡도 쓰지 않았으며, 성악곡조차도 관현악 반주로 썼다. 대신 누구보다도 뛰어난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을 발휘하였고, 실제로 지휘에도 재능을 보여 지휘자의 역할도 잘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맨티시즘이 지배한 19세기
음악에서 낭만주의는 독일 지역에서 싹이 터 베토벤, 베버,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확산되었지만, 제대로 된 한 방을 터트린 것은 베를리오즈였다. 그는 창작활동 초기에 내놓은 작품 하나로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렸고,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낭만주의 예술의 소재와 주제는 주로 꿈, 신비,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 전설이나 신화에서 취한 환상의 세계다. 이성과 조화를 강조한 고전주의의 에토스 미학에서 벗어나 개성과 열정, 과도함과 같은 파토스의 세계를 추구하는 한편 민족적인 특색도 중히 여겼다. 베를리오즈는 이러한 낭만적 요소들을 작품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보여준, 낭만적 실존 그 자체였다.
음악원 시절을 보내며 그는 평생 흠모하게 될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셰익스피어와 괴테의 문학작품을 탐닉하면서 드라마의 극적 구조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자신의 인생에 큰 파문을 몰고 올 한 여성을 발견한다. 영국 극단의 파리 공연에서 <햄릿>의 오필리아 역을 맡은 무대 위의 배우 해리엇 스미스슨(Harriet Smithson)에게 반한 것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그녀의 비범함, 그토록 고상하게 재연해낸 시적인 대사… 이런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셰익스피어 극단의 인기 배우 스미스슨은 오필리아에서 줄리엣으로, 데스데모나로 변신하며 이태 동안 이 젊은이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짝사랑의 열병에 단단히 빠진 그는 그녀와 만나기 위해 주변에 공을 들여 연을 만들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상대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로부터 날라 온 열렬한 구애의 편지에 대꾸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연상인 유명 여배우에게 무명 예술가의 구애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크게 좌절한 나머지 베를리오즈는 극심한 절망에 빠졌고,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로 울부짖는 그를 보며 주위에서는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 걱정할 정도였다.

<환상교향곡>, 실연의 고통이 음악으로
“실연에 빠진 예술가는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대신 기이한 환각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은 끊임없이 그의 상념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마녀들의 무도회 전야제에 사악한 마녀가 되어 무덤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
긴 악몽을 꾼 듯, 한 차례 감정의 격랑을 겪고 나서 그 봇물이 음악으로 쏟아졌다. 완성한 작품에 그는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어느 예술가의 생애의 에피소드’라는 부제도 붙였다. 자신이 겪은 한 여인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고백과 쓰디쓴 좌절, 그리고 긴 악몽을 전체 5악장에 담았다. 각 악장에는 영국의 소설가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아편 중독자의 고백>에서 영감을 얻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꿈과 정열’, ‘무도회’, ‘전원의 정경’, ‘사형장으로의 행진’, ‘마녀들의 밤의 향연’이라는 표제를 순서대로 붙였다.
기악음악은 원래 악곡 안에 일정한 내용(줄거리)을 담고 있지 않다. 두도막 형식, 3부형식, 소나타형식 등 일정한 틀 안에 작곡가가 구상한 악상을 담은 형식미를 추구하여 ‘절대음악’이라고 한다. 이와는 상반되는 개념의 표제음악(program music)은 특정한 이야기나 사상, 자연의 분위기 등 추상적인 것, 또는 문학이나 미술작품에서 받은 영감과 감동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때까지의 표제음악이라면 비발디의 <사계>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정도였는데, 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쓰기 직전에 베토벤이 교향곡에 합창을 도입한 것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일종의 서사를 교향곡에 도입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의 두드러진 경향이 더욱 진화된 것이며, <환상교향곡> 이후에 표제를 도입한 교향곡이 다수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이 교향곡에서 또 다른 독창적 시도를 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짝사랑의 여인을 일정한 선율의 ‘고정악상(idee fixe)’으로 표현했다. 그 선율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또는 기괴하고 격렬하게 바뀌며 매 악장에 등장한다. 전통적인 소나타형식에서의 주제, 주제를 발전시키는 방식과는 다른 전개 방식이다. 이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의도한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관현악의 표현도 극대화했다. 기본적으로는 2관 편성이지만, 필요에 따라 악기들을 추가하는 등 관현악의 획기적인 확장과 악기들의 독창적인 쓰임새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격적인 음향을 들려주었다.
<환상교향곡>은 서사적 표제를 도입하고, ‘고정악상’이라는 새로운 작곡기법과 파격적인 관현악기법으로 교향곡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 교향곡이 찬사만 받은 것은 아니다. 몇몇 통찰력 있는 음악가와 비평가들의 극찬을 제외하고는 상당 기간 ‘비르투오소적인 넌센스’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그 평가가 달라졌고, 지금도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목록에 올라와 있다. 한마디로 낭만주의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교향곡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음악의 별
스미스슨을 향한 소동이 <환상교향곡>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고, 또 다른 작품으로 ‘로마대상’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을 손질하고, 또 다른 작품을 포함해 음악회를 열게 되는데, 이 자리에 스미스슨을 초대했다. 지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녀와 만날 기회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몇 년 전에 다짜고짜 연서를 보낸 젊은이가 <환상교향곡>의 작곡가라는 사실에, 또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작품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음악이라는 데에 크게 흔들렸다. 베를리오즈는 다시 한번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에는 아들도 얻었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10년 만에 그들이 갈라섰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해리엇 스미스슨은 말년을 병고 속에서 고통스럽게 지냈는데, 베를리오즈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환상교향곡>의 성공 이후에도 그는 교향곡과 오페라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을 완성했다. 특히 1837년에 쓴 프랑스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대규모 편성의 <레퀴엠>, 역시 프랑스혁명을 기린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은 선율과 화성, 구성에서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극음악 형식의 <파우스트의 천벌> 역시 관현악과 성악이 어우러지는 대편성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작품이다.
베를리오즈는 문필가로서도 수준급이었다. 뛰어난 문재를 겸한 음악가- 슈만과 바그너를 능가하는 글솜씨로 음악평론을 비롯해 회고록과 다수의 에세이를 남겼다. 특히 ‘근대 오케스트레이션의 아버지’라 일컬으며, 그가 책으로 펴낸 <관현악기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금과옥조의 교본이 되고 있다. 동시대 프랑스의 작가 고티에는 <낭만주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작가 위고, 화가 들라크루아, 작곡가 베를리오즈를 프랑스 3대 낭만주의자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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