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가을이다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유쾌· 상쾌· 장쾌한 관현악 명곡들 낭만파 음악가들이 빚어낸 소리의 향연

"힘내, 가을이다" 지난해 가을 남산 산책로에서. 사진=장옥님
"힘내, 가을이다" 지난해 가을 남산 산책로에서. 사진=장옥님

시월의 높고 푸른 하늘, 그 아래 가벼이 떠다니는 흰 구름, 햇살에 빛나는 단풍 물든 나뭇잎들. 그 다채로운 색감은 음향으로 치자면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사운드가 아닐까. 관·현·타의 악기들이 한데 어울려 황홀한 음향으로 귀를 즐겁게 해주는 관현악곡은 주로 낭만파 음악의 산물이다. 대부분 여행지의 이국적 인상을 담거나, 독특한 민속악의 음률과 리듬을 빌려와 그때그때 떠오른 악상을 형식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펼쳐낸 곡들이다.

랩소디· 카프리치오· 판타지· 로망스 등 갖다 붙인 이름도 다양한데, 굳이 이러한 곡들을 따로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내뿜는 힘찬 에너지가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이맘 때에 듣는 이의 기분과 기운을 북돋는데 제격일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도 이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애초에 일본식 번역으로 클래식을 접한 우리는 그 번역용어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데에 애를 먹었고, 요즘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광시곡(狂詩曲)으로 번역된 ‘랩소디’(rhapsody)는 원래 음유시인의 서사 문학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음악에서는 서사적·영웅적·민족적 색채를 갖는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기악곡의 명칭에 쓰이게 되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비르투오소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랩소디를 대중적인 악곡으로 크게 유행시킨 인물이다.

리스트는 열세 살 때 고향 헝가리를 떠나 일찍부터 비르투오소 음악가로서 유럽을 전전하며 명성을 날렸다. 스물일곱 살 때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해 연주했는데, 그때 보여준 동포들의 열렬한 성원과 환대에서 진한 조국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 감동은 여러 곡의 ‘헝가리’가 제목에 들어간 곡을 작곡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꾸준히 집시음악과 마자르 민요를 수집, 연구했고 평생에 걸쳐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을 모두 19곡이나 작곡했다.

처음엔 피아노 독주용으로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여섯 곡이 관현악으로 편곡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제 2번이 6, 10, 12번과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다. 헝가리 랩소디 제 2번은 집시의 무곡 차르다시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장중함을 주는 짧은 서주에 이어 느리고 비장한 느낌의 라수(Lassu)부분이 나온다. 몇 차례 반복하며 주제선율을 확실하게 부각시킨 후에는 빠르고 활기찬 춤곡 프리스카(Friska)로 전환된다. 이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은 서로 경쟁하듯 빠른 템포로 흥겨움을 고조시키며 달린다. 열정적이고 화려한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곡을 마치는데, ‘광시곡’이란 번역이 딱 들어맞는 음악이기도 하다.

유튜브 동영상=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2번

<헝가리 랩소디>가 인기를 끌면서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이 많이 작곡되었다. 모두 지역적, 민족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로 민요나 민속무곡의 리듬을 녹여낸 흥겹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곡들이다. 루마니아의 작곡가 에네스쿠는 <루마니아 랩소디>를 두 곡 남겼는데, 그중 1번이 더 자주 연주되고 있다. 루마니아 역시 집시음악이 번성했고, 농민들 사이에 전해져온 민속무곡도 풍부한 지역이다. 이러한 음악들을 소재로 활기 있고 경쾌한 랩소디를 작곡한 것인데, 듣다 보면 민속음악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작품이다.

프랑스 작곡가 샤브리에는 스페인의 춤곡 호타와 말라게냐를 바탕으로 밝은 분위기의 유쾌함이 가득한 관현악곡 <스페인 랩소디>를 남겼고, 20세기 미국에서는 조지 거쉰이 재즈의 요소를 기반으로 한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하여 이 방면의 손꼽히는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유튜브 동영상=에네스쿠의 루마니아 광시곡

‘변덕’, ‘공상’을 의미하는 카프리치오

음악에서 카프리치오(이탈리아어 cappriccio, 영어 카프리스 caprice)는 ‘즉흥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탈리아 바로크시대부터 기악곡에 쓰인 예가 있는 오래된 악곡 형태인데, 오래된 용어인 만큼 시대에 따라 그 음악적 특징도 변모를 거쳐왔다. 낭만파 음악에서는 접속곡 풍으로 길이가 긴 것도 나오는 등 차츰 소품 이상의 규모가 되었다. 카프리치오(기상곡 綺想曲) 역시 일정한 틀은 없지만 세도막 형식이 자주 쓰이고, 말 그대로 자유로운 기분이 악상에 반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명 작품으로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차이콥스키 <이탈리아 기상곡>이 있는데, 두 곡 모두 인상적인 이국의 풍경을 담은 음악적 스케치이다.

30대 후반의 차이콥스키는 원치 않은 결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자살소동에 이어 이혼을 결심하고는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떠난 게 1879년 12월. 여행지 로마에 머물면서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자극받은 그는 곡에 대한 영감도 얻었는지 지인에게 쓴 편지를 통해 민요의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곡을 쓰고 있음을 알렸다. 로마에서는 스케치만 완성했고, 이듬해 3월 귀국해 완성한 곡이 바로 이탈리아 기상곡(Italian Capriccio). 이 작품에는 그가 로마에서 받은 좋은 인상들- 온난한 기후와 경쾌한 도시 분위기, 화려한 유적과 예술품이 준 감동과 함께 결혼생활로부터의 해방감까지. 이 모두를 오케스트라의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에 담아냈다.

유튜브 동영상= 차이콥스키의 이탈리안 카프리치오

젊음의 환희와 낭만을 담은 <대학축전 서곡>

단악장의 관현악작품 중엔 ‘서곡’이란 타이틀을 단 것도 있다. 서곡은 주로 오페라의 막을 여는 곡이지만, 어떤 특정한 계기로 인해 작곡되어 ‘연주회용 서곡’이라 붙이기도 한다.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과 차이콥스키의 <연주회용 서곡 1812년>이 대표적이다.

브람스는 1880년경 비슷한 시기에 두 곡의 연주회용 서곡 <대학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을 차례로 작곡했는데, 스스로 ‘웃는’ 서곡과 ‘우는’ 서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중 ‘웃는’ 서곡인 <대학축전 서곡>은 1879년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든 곡이다. 브람스를 열렬히 지지했고, 그를 학위자로 지명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한 지휘자 베른하르트 숄츠는 그 기념으로 교향곡이나 관현악곡의 헌정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브람스는 당시 학생들이 즐겨부르는 노래와 민요 등- ‘어여쁜 장미’, ‘국가의 노래’, ‘신입생의 노래’, ‘즐겁게 노래하라(가우데아무스 이지투르)’에서 선율을 따와 장쾌한 분위기의 관현악곡을 작곡하게 된다. 학문과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격조와 함께 젊음의 풋풋함과 활기 가득한 서곡을 대학에 헌정한 것이다.

사실 브람스는 소년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고자 피아노 연주로 돈벌이에 나서느라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명예박사학위를 두 번이나 받을 뻔했는데,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학위를 수여하기 3년 전인 1876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주겠노라고 연락이 왔었다. 조건은 하나, 학위 수여 현장에 꼭 참석하라는 것. 그러나 그는 배를 타기 싫어했고, 영어 울렁증도 심했다. 게다가 작곡 중이던 교향곡 1번의 완성을 앞두고 있던 참이었기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위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튜브 동영상=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

PS : 이번 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힘내, 가을이다”는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셨던 고 한원주 박사(2020년 작고)의 마지막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글쓴이

장옥님 칼럼니스트

장옥님 칼럼니스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작곡)과 음악학을 전공하였음. KBS FM라디오에서 다수의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및 콘서트, 대중음악프로그램을 제작하였음. 저서로는 <위기의 음악가들, 2021년>, <KBS월드뮤직, 2006년(共著)> 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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