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가 가고 ‘리즈’가 왔지만...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트러스 총리, 본명은 ‘엘리자베스 트러스’ 엘리제, 리사 등 약칭 많은 ‘엘리자베스’ 서양식 약칭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에티모버스’(Etymoverse)’는 어원을 뜻하는 E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필자가 합성한 말이다. 어원에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비유 속에 담겨 있어 세계에 대한 인류의 다양하고 심오한 사유를 알게 해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최근 영국 정치계에는 두 명의 엘리자베스(Elizabeth)가 서로 바톤을 주고 받았다. 첫 번째 엘리자베스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이고 두 번째 엘리자베스는 총리 리즈 트러스(Liz Truss)다. Liz도 Elizabeth의 약칭(diminutive)이기 때문이다. 리즈 트러스의 여권에는 Elizabeth Truss로 되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떠났지만 리즈 트러스는 취임한 직후부터 자신이 제시한 대규모 감세안이 거센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면서 때 이른 퇴임 여론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여왕도 국내외로부터 식민 지배의 우두머리로 일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로 평가를 받았던 반면, 트러스는 PINO(Prime minister In Name Only), 즉 ‘무늬만 총리’라는 조롱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서양이름 약칭은 어떨때 쓸까
서양인 이름의 약칭은 일반적으로 격식을 차리지 않는 상황이나 친근한 사이에서 널리 쓰인다. 예컨대 이름이 엘리자베스인 여성은 흔히 상대에게 “편하게 ‘리즈’라고 불러요(Just call me Liz)”라고 말하고는 한다. 그래서 약칭은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경우 유권자나 팬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영국의 트러스 총리도 이 같은 이유로 엘리자베스 대신 스스로가 ‘리즈’로 불리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름이 약칭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술집에서는 취객이 여종업원을 엘리자베스라고 부르는 일이 없고 Liz라고 하는 것처럼, 친근함을 넘어 때로는 약간의 무시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경멸을 하려는 분명한 의사가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약칭을 사용한다. 영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Ireland)에서는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지난 9월 8일 스웨덴과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경기에서 홈팀인 섐록 로버스(Shamrock Rovers)의 많은 팬들이 “리지가 관에 들어갔다(Lizzie’s in a box)”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박수를 쳤다. Lizzie(리지)도 Liz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의 약칭이다.
엘리자베스 이름의 유래와 변이
엘리자베스는 성서에 나오는 아론(Aaron)의 아내인 ‘엘리세바’(Elisheba)에서 기원한 이름이다. 이는 히브리어 אלישבע (Elisheva, 엘리 셰바)에서 온 것인데, “나의 하느님은 맹세이다”, 즉 하느님은 나를 구원해 주기로 맹세하셨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것이 그리스어로 Ἐλισάβετ (Elisábet)라고 표기되었고, 후기 라틴어에서는 Elisabeth로 표기되었다. 이 철자를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에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영어에서는 s를 z로 바꿨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에서 ‘이사벨라’(Isabella)라는 변이형을 낳았다. 현재의 스페인 영토를 만들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을 지원한 여왕 이사벨라 1세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러니까 영국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고 스페인에는 이사벨라 여왕이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프랑스로 가서는 ‘이자벨’(Isabelle)을 낳았다. 이것이 다시 영어에 유입되어 Isabell 혹은 Isabel이라는 형태로도 표기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이래 여자의 이름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끈 이름이었는데, 통계에 의하면 1880년 이후 미국에서 26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동양에서 이름을 짓는 작명(作名)에 비해 서양에서는 기존의 이름 목록, 특히 기독교 성인의 이름 목록 가운데에서 고르는 방식이다.
이름 약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엘리자베스는 그 인기만큼이나 약칭도 많다. 아마 약칭이 가장 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약칭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은 특정 음절(들)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림으로써 짧게 만드는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 여기에 ‘y’나 ‘ie’를 붙이기도 한다.
우선, 1음절을 중심으로 앞부분을 취하고 뒷부분을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약칭들을 들 수 있는데, ‘엘, 엘리, 엘라, 엘렌즈, 엘리자’(El, Elle, Ellie, Ella, Ellenz, Eliza) 등이 그 예가 된다. 이 약칭들의 독일어 버전은 ‘엘리제, 엘저, 엘츠, 엘차’(Elise, Else, Elz, Elza) 등인데, 특히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름이다. 또한 스칸디나비아어권에서는 ‘엘자’(Elsa)가 되어 매우 흔한 이름이 되었는데, 이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채택되어 유명해졌다.
둘째 음절을 취하여 약칭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리즈, 리지’(Liz, Lizz, Lizzy, Lizzie)를 들 수 있는데, 예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Taylor)가 흔히 ‘리즈 테일러’로 불렸던 것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예인 Lizzie를 상기하면 될 것이다.
또한 둘째~셋째 음절을 취한 것에 ‘리스, 리시, 리사, 리자’(Liss, Lissy, Lisa, Liza, Leeza, Leesa) 등이 있는데, 특히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리사’이다. 오늘날 한국의 케이팝 그룹인 블랙핑크의 ‘리사’도 있고 한참 예전으로 올라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 리자’(Mona Lisa)도 있다.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에서 My lady를 뜻하는 마돈나(Ma donna)의 경칭이다.
한편 둘째~넷째 음절을 취한 것에는 ‘리즈벳’(Lizbet, Lisbet, Lizbeth)이 있고, 셋째~넷째 음절을 취한 것에는 ‘잽, 재비’(Zab, Zabby) 등이 있다.
넷째 음절만을 취한 것들도 있는데 ‘베트, 베티, 베스, 베시, 베사, 비티, 페티’(Bette(‘베트’ 혹은 ‘베티’로 발음), Batty, Beth, Bethie, Betha, Bitty, Petty) 등이 그러하다. 이 가운데에서 한국의 올드팝 애청자에게는 킴 칸스(Kim Carnes)의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 (Bette Davis Eyes))가 기억에 남아 있으리라.
이처럼 엘리자베스의 약칭은 풍성하다. 이 가운데 리즈 트러스는 ‘리즈’를 택해 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국민들은 그녀를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치 분야에서 이미지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래도 역시 어느 정도의 콘텐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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