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스포츠에서 꼭 배워야 할 것

국대감독 둘러싼 축구협회 사태 젊은 스포츠인 키운 스페인과 대조돼 정치권도 20~30대 찾아보기 어려워 우리는 왜 젊은이들을 못믿는 것일까

유럽축구연맹의 국가대항전인 '유로 2024'에서 정상에 오른 스페인 국가대표팀. 사진=연합뉴스
유럽축구연맹의 국가대항전인 '유로 2024'에서 정상에 오른 스페인 국가대표팀. 사진=연합뉴스

▶ 유튜브로 칼럼 듣기

우리 젊은 영웅들은 어디있나

지난 7월 15일 새벽 두 가지 대형 스포츠 이벤트로 스페인 전역이 환호와 열광에 휩싸였다. 하나는 테니스에서 알카라스의 윔블던 오픈 2연패 소식이었고, 또 하나는 유럽축구연맹(UEFA)의 국가대항전인 ‘유로2024’에서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잉글랜드를 누르고 사상 네 번째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이 두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공통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젊은 피’의 활약이다.

윔블던 우승자 카를로스 알카라스는 2003년 5월5일 생으로 21살, 유로2024의 결승전에서 첫 골을 넣은 니코 윌리엄스는 2002년 7월 12일생으로 22살, 또 4도움(1골)을 올리며 대회 도움왕에도 등극한 라민 야말은 이 대회의 베스트 영플레이어상을 수상했는데, 그는 2007년 7월 13일생으로 17살이어서 사상 최연소이다. 동점골을 넣은 잉글랜드의 콜 파머도 2002년 5월 6일생으로 22살이다.

우리나라 축구협회는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이런 데에 관심과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한때 반짝하는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젊은이들의 양성 시스템을 갖추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격려를 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2002년 월드컵 때 정점에 올랐던 것을 계기로 마련되었던 축구 붐을 우리는 잘 활용하여 한국 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최근의 우리나라 축구협회의 상황을 보면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20대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는 한국

또 하나 우리의 분노를 야기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정치 분야이다. 유럽에서는 젊은 정치인들을 찾는 것이 너무나 쉽다. 우선 지난 1월에 임명된 프랑스의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1989년 생으로 34살이고, 핀란드의 산나 마린도 2019년에 34세의 나이로 총리가 되어서 당시에 ‘지구촌 최연소 행정수반’으로 떠들썩하게 했으며,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도 2017년 31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소 국가지도자 자리에 올랐었다.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도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30대의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이 이제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유럽의회와 프랑스 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던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당대표 조르당 바르델라는 심지어 29세이다.

프랑스의 제16대 하원 의원 4명 중 1명이 20~30대이고, 노르웨이의 경우 30세 미만 국회의원 비율이 OECD국가 중 가장 높아서 13.6%에 이르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22대 국회의원 중 20대 의원은 한 명도 없다. OECD 국가의 국회의원 평균 연령은 49.5세인데 한국의 22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6.3세로 높으며 50~60대 의원이 250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에는 20대 국회의원도 많고 당대표도 있는데, 우리는 하나도 없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20대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현재로서는 매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솔직히 우리는 청년들을 아직 국가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는 ‘아이’ 취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왜일까?

우리 사회는 젊은이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젊은이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이를 왜 아이 취급을 할까?

기성세대의 경제력 장악으로 자녀세대가 의존적이 되는 이유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전통적 자녀관과 양육 문화가 원인이 아닌가 한다. 서양과 달리 아직도 우리는 자식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평생 돌봐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다. 마마보이나 헬리콥터맘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시집장가 보내고 나서도 자녀들을 완전히 독립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녀들과 소통하면서 양육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아이 취급하는 시각을 영속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실제로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유럽 등의 젊은이들에 비해 어른스럽지 못한 측면, 즉 자신의 생활과 관련한 문제들의 해결 능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는 한국 특유의 경쟁적 사교육 시스템에 매몰되어 있어 공부 외의 생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경험을 박탈당하는 데서 오는 문제일 것이다.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보면 모든 문제를 스스로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더 뛰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보다 근본적으로 유교 문화가 가지는 서열주의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열주의는 국가의 질서를 잡기 위해 유교가 설정한 인간관계의 규율인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삼강(三綱) 가운데 ‘부위자강’(父爲子綱)은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므로 자식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오륜(五倫) 가운데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강령들은 ‘나이’에 의한 수직적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설정한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사상과 요즘 자조적으로 말하는 ‘나이가 깡패’라는 관념이 이렇게 하여 생성된다.

그렇다면 왜 유교에서는 ‘늙음’을 ‘젊음’보다 우선시하는 것일까? 최근 젊음을 늙음보다 더 중요시하는 사회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최근 들어 나타난 변화이다. 원래는 ‘늙음’이 ‘나이가 들어서 경험을 많이 한, 그래서 원숙한 상태임’을 함축하는 긍정적 개념이었다. 반면에 ‘젊음’이란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한, 그래서 미숙한 상태임’을 함축하는 부정적인 개념이었다.

젊은 것은, 어리고 어리석고 모르는 것일까

이는 ‘노소(老少)’라는 단어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을 병기할 때는 항상 긍정적 가치를 앞에, 부정적 가치를 뒤에 놓는 것이 어느 언어에서건 보편적인 규칙이다. 이를테면 길고 짧음을 함께 표현하는 ‘장단(長短)’이라는 말은 긍정적 가치를 나타내는 ‘장(長)’을 앞에, 부정적 가치를 나타내는 ‘단(短)’을 뒤에 놓아 만든 말이다.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고저(高低)’와 강하고 약함을 나타내는 ‘강약(强弱)’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소’에서 ‘노’가 ‘소’에 앞서는 것이 ‘노’(老)가 ‘소’(少)보다 긍정적인 가치임을 알려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말 ‘어리다’는 본래는 어리석다는 뜻이었는데, 이 뜻이 ‘어리석다’라는 단어로 이동하고 자신은 오늘날 쓰는 ‘어리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본래 ‘어리다’는 뜻을 가진 ‘졈다’(젊다)가 ‘어리다’보다는 다소 긍정적인 뜻(청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원숙함의 경지보다는 여전히 낮은 단계의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점잖다’라는 말이 이를 입증해 준다. 이는 ‘젊지 않다’라는 말의 줄임말로서 젊지 않기에 언행이나 태도가 의젓하고 신중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말에 ‘망나니’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막 낳은 이’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으니 세상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뜻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 말은 사형을 집행할 때에 죄인의 목을 베던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나중에 언동이 몹시 막된 사람을 비난조로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사실 막 태어난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여 영어에서도 naive(나이브)는 갓 태어났다는 뜻에서 출발한 단어인데 ‘순진해 빠졌다’라는 뜻을 나타내고, 이는 native(네이티브: 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와도 어원을 같이한다.

20~30대에게 믿고 맡기자

이같은 내용은 유교의 문화에서 젊은 사람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복종하는 존재로 간주하게 하는 배경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가 더 이상 3~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중심의 농경사회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창의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핵가족화된 지식산업사회이다. 그러므로 스페인 스포츠의 성공에서 보듯이, 젊은이들이 사회 각 분야 참여하도록 적극 권장하는 문화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혼란을 빨리 수습하고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체제를 갖추기 바란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젊은 정치인의 참여 증가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 지향적인 정책 수립에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치 참여 기회 확대와 정치 문화 개선 등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제 기성세대는 좀 뒤로 빠지고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면 좋겠다. 20~30대 정치인들을 선출하여 이제는 믿고 맡겨 보자!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베가북스)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씨엘) 등이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