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無罪)가 죄가 없는 것이 아닌 이유
양승태 전대법원장 무죄 판결에 대해 무죄가 ‘죄 없음 으로 읽혀선 안돼 곳곳에 무죄 아닌 ‘증거 불충분’ 판결 ‘유죄 아님’, ‘추정 무죄’란 표현은 어떨까
어이없는 “양승태 무죄” 판결
지난 26일 1심 법원이 ‘사법농단 사태’로 기소되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47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한쪽에서는 검찰 수사가 무리했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사법부가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제 식구 감싸기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언론에서 떠들썩했던 사건들이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자료로 활용된 의심되는 문건들이 여러 확인되는 등 많은 부분이 사실로 확인된 바 있으므로, 이것이 이렇게 무죄로 결론이 나왔다는 것, 특히 제기된 모든 혐의에 대해 단 하나의 유죄도 없이 전부 무죄가 나왔다는 점에 허탈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물론 일반 국민이 법리적인 해석의 원리까지 알 수는 없다. 심지어 많은 경우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내용들을 어찌 국민들이 알겠는가? 예컨대 양 전 대법원장이 정황상 개별 재판에 개입한 사실은 일부 인정되지만 법률상 대법원장에게는 그것을 지시할 직무 권한 자체가 없었으니 그것을 그가 남용했는지도 따질 수 없어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거가 그것이다. 즉 그의 행위가 범죄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용할 직권(재판부에 대해 지적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도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들은 권한도 없으면서 상하관계를 이용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나쁜 일이라는 지적을 한다. 사실 법관의 독립성으로 간섭할 권리가 없다면 업무방해라도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무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리적 해석 외에도 근본적으로 법원의 모든 판결이 일반 국민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무죄’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오해이다. 사실 ‘무죄’(not guilty)가 반드시 ‘죄가 없음’(결백함 innocent)을 뜻하지 않는다.
영미권 법원에서는 피고가 혐의가 있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을 때에, 즉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죄에 해당할 때에는 이를 ‘Innocent’라고 하는 반면에, 검찰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였을 때는 ‘Not guilty’라고 하여 구분한다. 따라서 ‘Not guilty’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무죄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법정에서 혐의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법원이 판결을 내릴 때 검찰이 유죄 입증 책임을 다했는지의 여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대부분 ‘Innocent’라는 표현보다는 ‘Not guilty’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개념상의 구분이 있다. 형사소송법 제325조에는 ‘피고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는 판결로써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란 ①공소사실의 부존재(不存在)가 적극적으로 증명되거나 ②증거가 불충분하여 법관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갖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①은 혐의가 있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미권의 ‘Innocent’에 해당하고, ②는 ‘Not guilty’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영미권에서나 유죄가 확실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법률 체계의 기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Principle of presumption of innocence)에 따라 피고의 절대적인 무죄를 반드시 확인하지 못하였을 때는 무죄로 판결하도록 함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영미권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법원이 실질적으로 판결에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죄’(無罪)를 사용하는 반면, 영미권에서는 ‘유죄(有罪) 아님’(Not guilty)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어 용어 ‘무죄’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유죄가 아닌 경우까지 피고가 마치 결백하여(Innocent) 무죄를 받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여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불만을 갖게 한다. 또한 많은 정치인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확정받은 경우에 마치 자신이 결백한 것인 양 사실을 호도하는 여지를 주기도 한다.
양승태는 ‘증거불충분’일 뿐이다
이번 사건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받았던 혐의는 다음과 같다.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과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등 법원의 위상을 강화하고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한 혐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대상으로 문책성 인사조치를 지시하거나 ‘법관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탄압한 혐의, 사법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법관들의 비위를 축소·은폐하는 등의 혐의 등이다. 이러한 혐의들에 대해 모두 공소사실의 부존재, 즉 이 같은 혐의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적극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판결문에도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표현이 수없이 사용된 것을 보면 사실 모든 혐의들이 부인된 이유는 결국 증거 불충분이다. 판결문에서 일부 위법 행위가 있었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는데,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법원 행정처가 판사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의혹에 대해서, 비판적 소모임을 와해시키는 과정에 양 전 원장이 공모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고, 헌법재판소를 견제하려고 동향을 수집하고 언론 칼럼을 대필해 준 혐의 등에도 공모한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무죄가 아니라 ‘유죄 아님’이라 하면
이처럼 유죄가 입증되지 않아서 내려진 경우 ‘무죄’ 대신 영어권처럼 ‘Not guilty’와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없을까? (프랑스어권에서도 Innocent 대신 Non coupable이라 함) 예컨대 ‘비(非)유죄’나 ‘유죄 아님’, 혹은 ‘추정 무죄’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까? 처음에는 어색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관용성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복합어로 기능할 것이다.
사실 영어의 ‘Not guilty’도 그 같은 길을 걸은 결과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단지 용어의 교체가 아니라 쓸데없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공연한 감정 낭비도 막을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 그리고 “나 무죄 나왔어.”라며 엉터리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단골 억지도 사라지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