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오용(誤用)하는 한국 사회
[안세영 선수의 좌절과 성공을 보며] 한번 좌절일 뿐, 쉽게 실패했다고 단정해 젊은이에 ‘그냥 열심히 해라’는 말 대신, 다시 도전하라며 섬세하게 격려해주자 그리고, ‘많은 안세영’을 키워내자
요즘 국가대표 여자 배드민턴 안세영 선수의 투혼에 찬 승리가 온 국민의 화제이다.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중국의 천위페이를 맞아 제 1게임 도중 무릎 근처 힘줄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이후 치료를 받고 다시 코트에 올라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제 2게임을 내주고도 마지막 제 3게임에서 승리하여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그녀의 놀라운 투혼이 우리를 감동으로 이끈다. 성공은 언제나 강한 의지가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그녀는 이를 붙잡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성공은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할까?
우리말에는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는 여러 어휘들이 있다. ‘성취’, ‘달성’, ‘실현’, ‘결실’, ‘성공’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동의어이기는 하지만 다소간의 의미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공’은 완전히 그 의미가 다르다.
‘성취’와 ‘달성’은 모두 목적한 바를 이룸을 뜻하는데, 전자는 그 결과를 자신이 소유함을 강조하고, 후자는 설정한 목표에 도달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현’은 원하는 것을 실제로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일을 추진하는 마지막 단계, 즉 현실화하는 단계에서의 성취를 강조하는 말이다. ‘꿈의 실현’, ‘실현 단계’, ‘복지 사회 실현’, ‘이번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높다’와 같이 쓰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결실’ 역시 목적한 바를 잘 이룸을 뜻하는데, 특히 성과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반면에 ‘성공’은, 기본적으로는 위의 말들처럼 목적한 바를 이룸을 말하지만, 반드시 여러 번의 시도와 좌절 끝에 성취함을 뜻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성공은 그 이전의 일련의 시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성공이라 하지 않는다. 단번에 되었다면 그것은 그저 ‘된 것’이지 굳이 ‘성공’이라 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되던데, 너는 안 되니?”라고 말할 뿐이다. 그만큼 성공은 어려운 것이어서 ‘저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요컨대 성공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물론 ‘그는 단번에 성공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남들이 실패했던 경우에 한한다. 성공이 오죽 어려우면 흔히 성공을 ‘빈다’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성공 ‘사례’를 수집하겠는가?
왜 우리는 단번에 성공하지 못할까?
그렇다면 성공의 반대말인 ‘실패’는 어떤 뜻일까? 이 말도 과연 성공의 반대말답게, ‘여러 번의 시도와 좌절에도 결국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한 번 안 됐다고 실패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한 번의 ‘좌절’일 뿐이다. 국어사전에 ‘좌절’은 ‘어떠한 계획이나 일 따위가 도중에 실패로 돌아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좌절은 한 번의 ‘경험’이다. 과연 우리는 좌절을 ‘겪는다’, 좌절을 ‘맛본다’고 말한다.
반면에 ‘실패’는 ‘결론’이다. ‘끝내 실패했다’라는 표현이 이를 입증한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모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은 이런 ‘실패’의 정의와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
그러나, 이 같은 ‘실패’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한 번의 좌절’에 너무나 쉽게 ‘실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벤처 투자 환경을 보아도 딱 그렇다. 투자운용사들은 기술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생각만 한다. 그래서 한 번 실패한 사람은 다시 투자자를 구할 수 없다.
안세영은 어떻게 실패를 딛고 성공에?
그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8번 전승으로 모든 선배들을 이긴 뒤 각종 국내외 대회에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8년 아시안게임 초반에 천위페이 선수를 만났는데, 이 첫 대결에서 처절하게 완패한 이후 절치부심하여 준비했지만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도 그녀에게 다시 패하고 만다. 소위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껴져서 포기할 만도 했지만, 안세영은 또다시 일어나서 결국 올해부터 천위페이를 이기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이기고 있다. 이처럼 성공은 안세영에게도 여러 번의 좌절과 실패 끝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제 1게임 후반부에 뜻하지 않게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기회에서 또다시 불행이 그녀를 엄습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라는 편안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체력이 약한 상대의 기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3게임까지 끌고 가며 승부를 거는 지략까지 발휘하며 눈물겨운 승리를 따냈다.
나는 그냥 열심히 하라는 말, 그냥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참 싫어한다. 매우 무책임한 말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목표로 가고 있는 도중에는 반드시 실패(‘좌절’이 맞지만 많은 사람들처럼 ‘실패’라 하자)가 예정되어 있기에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도록 하느냐가 문제인데, 한가롭게 열심히 하라는 말은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더욱 큰 좌절감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그들에게는 이번의 실패로 인해 성공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 것임을 일깨워 주고, 다시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 그리고 개인이 처한 환경에 맞는, 보다 섬세한 조언을 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국사회, 실패를 격려하자
그러나 한국의 성취주의는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다. 단지 성취라는 결과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성공은 기본적으로 여러 번의 좌절을 요구한다. 아니 항상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 실패한 젊은이들을 방치한다. “내가 그랬지? 그거 하지 말라고”라며 의지를 꺾는다.
우리 사회는 실패한 사람을 격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지 이를 극복한 소수의 사람을 영웅시하며,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앞다투어 칭찬한다. 특히 여론을 조성하고 국민을 이끌어야 할 언론도 그러하고 정치권도 그러하다.
이제 이러한 문화를 바꾸자. 그것이 현재 1인당 GDP 3만5000 달러와 진정한 선진국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대한민국을 다시 전진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일시적인 하나의 안세영 출현에 만족하지 말고, 구조적인 많은 안세영 만들기에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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