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친밀한데, 내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캠브릿지 사전 올해의 단어 ‘parasocial’ 플랫폼 시대, 개인-유명인 새 관계설정 친밀하나 책임지지 않고 “비판도 안돼!” 팬덤 정치에서도 ‘관계의 불균형’ 드러나 어떤 친밀함을 ‘관계’로 정의할수 있을까

대중 인기인과 시청자가 느끼는 parasoial 관계.
대중 인기인과 시청자가 느끼는 parasoial 관계.

관계가 설계되고 관리되는 시대

우리는 언제부터 모르는 사람의 안부를 진지하게 걱정하게 되었을까. Parasocial(유사 관계)은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관계가 설계되고 관리되는 사회의 구조를 가리키는 단어다. 캠브릿지 사전이 2025년 ‘올해의 단어’로 parasocial을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인물의 기분 변화에 하루의 감정이 좌우된다. 그의 선택에 분노하고 실망한다. 휴식 선언에 함께 지치고, 복귀 소식에 안도한다. 사과문 한 줄에 마음이 바뀌는 경험도 낯설지 않다. 이 감정은 과잉이 아니다. 오늘날 친밀함이 작동하는 정상적인 방식이다.

parasocial의 ‘비대칭적 관계’의 의미

Parasocial 관계는 원래 텔레비전 시대의 개념이었다. 뉴스 앵커와 드라마 인물, 예능 진행자는 정해진 시간에 화면에 등장했다. 시청자는 그 얼굴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관계에는 경계가 있었다. 방송이 끝나면 관계도 멈췄다. 친밀함은 현실의 인간관계를 대신하지 않았다. 일상의 공백을 잠시 채우는 장치에 가까웠다.

플랫폼 시대는 이 경계를 해체했다. 유튜브와 OTT, SNS, 팬 플랫폼은 친밀함을 상시화한다. 알고리즘은 특정 인물을 반복 노출한다. 개인화된 피드는 ‘나만 아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강화한다. 댓글과 라이브 스트리밍, 멤버십 콘텐츠는 비대칭적 관계를 상호적인 관계처럼 느끼게 만든다. Parasocial은 더 이상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다. 유지되고 관리되는 관계가 되었다.

아이돌 팬덤은 이 구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팬은 음악이나 무대만 소비하지 않는다. 말투와 감정 상태, 휴식 여부까지 공유받는다. 응원은 정서적 참여를 넘어 노동에 가깝다. 콘텐츠를 따라가고 반응해야 관계가 유지된다. 침묵은 이탈로 해석된다. 친밀함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친밀함은 선택이 아니고 의무다

OTT 드라마와 배우의 스타 시스템도 다르지 않다. 작품이 끝난 뒤에도 관계는 계속된다. 인터뷰와 비하인드 영상, SNS 콘텐츠가 이를 연장한다. 시청자는 서사와 관계를 동시에 소비한다. 작품 비평은 배우 개인에 대한 평가로 쉽게 이동한다. 비판은 배신처럼 받아들여진다. 애정은 자동적인 방어로 작동한다. 감상과 관계의 경계가 흐려진다.

크리에이터 문화에서는 parasocial의 밀도가 더 높다. 브이로그와 고백형 콘텐츠는 가까움을 전제로 설계된다. 시청자는 관계를 관리하고 있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좋아요와 댓글, 후원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다. 관계 유지를 위한 신호다. 친밀함은 선택이 아니다. 의무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자원이 된다. 조회수와 구독자 수, 참여율은 친밀함의 지표가 된다. 감정은 데이터로 환산된다. 사랑과 관심은 숫자로 관리된다. 관계는 알고리즘의 성과 지표 안에서 평가된다. Parasocial은 감정의 자유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감정을 조직하고 통제한다.

이 구조는 문화 산업 전반에서 반복된다. 좋아함은 소비로 연결된다. 관계 유지는 구독과 구매로 이어진다. 팬이 된다는 것은 감정적 선택이다. 동시에 경제적 참여다. 문제는 책임의 부재다. 친밀함은 강화된다. 실망과 상처는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플랫폼과 콘텐츠 제공자는 이 감정의 후과를 책임지지 않는다.

정치 영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출발점이 아니다. 문화 소비를 통해 형성된 관계 감각이 확장된 결과다. Parasocial을 정치 문제로만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이는 먼저 문화의 문제다. 미디어 환경의 문제다.

캠브릿지는 ‘관계의 불균형’에 주목해

Parasocial 관계는 고립을 해소하지 않는다. 고립을 관리한다. 우리는 수많은 인물과 연결된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 연결은 책임이나 연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친밀함은 늘어난다. 공동체는 단단해지지 않는다. 실제 관계를 맺을 에너지는 소진된다. 관계는 점점 가벼워진다. Parasocial은 외로움의 해법이 아니다. 외로움을 견디게 만드는 장치다.

Parasocial이 2025년의 단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관계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관계의 형식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아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 친밀함은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캠브릿지 사전의 선택은 이 불균형을 정확히 지목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몰입이 아니다. 어떤 친밀함을 ‘관계’로 부를 것인지 다시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글쓴이

박미숙 대중문화 독립연구가

박미숙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중문화를 연구했다. 영국에서 한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아시아학이며 세부 전공은 한국학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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