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만들고 편집한 ‘하나의 아시아’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개막식 장면.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개막식 장면.
  • 국가 브랜드의 무대가 된 아시안게임 개막식 일본은 전통과 첨단 기술을 결합한 절제된 연출을 통해 아시아의 평등한 일원이 아닌, 아시아를 초대하고 배열하는 ‘중심이자 연출자’의 자리를 자처했다.
  • 지워진 역사와 모순적인 화합의 구호 천황의 개막 선언과 ‘하나의 아시아’라는 구호 속에는 과거 제국주의의 책임과 역사적 갈등이 철저히 배제된 채, 일본의 국가 이미지만 미화됐다.
  • 스포츠 중계와 국가주의의 결합 비판 방송은 선수의 희생과 승패의 감동을 국가주의적 열기로 포장하고 소비하게 만든다. 시청자에게 화려함 뒤에 가려진 역사와 불평등한 구조를 비판적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나고야에서 개막된 ‘아시안 게임’

국제스포츠 중계는 경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흩어진 국민을 같은 시간과 감정 속에 묶어 ‘우리’를 만든다. 국가대표 선수의 승리는 국민의 승리가 되고, 패배는 국가의 좌절이 된다. 방송은 국기와 국가, 선수의 눈물과 관중의 함성을 반복해 보여주며 이 감정을 조직한다. 스포츠 중계는 공동체를 발견하는 방송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산하는 방송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서로의 삶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아니다. 승패에 따라 잠시 결집하는 감정 공동체다. 선수의 오랜 훈련과 부상, 생계와 불안은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문장 속으로 사라진다. 반면 기대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 책임은 선수 개인에게 돌아간다. 승리의 영광은 국가가 가져가고 실패의 수치는 선수가 감당한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국제스포츠가 국가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본은 ‘조화로운 심장박동’을 주제로 나고야성과 가부키, 전통 설화와 춤을 현대적인 조명 및 무대기술과 결합했다.

일본이 아시아에 보여주고 싶었던 국가상은 분명했다. 오래된 문화를 지키면서 첨단산업을 발전시킨 국가, 혼란보다 질서를 중시하고 과시보다 정교함을 앞세우는 국가였다.

개최지가 나고야라는 점도 중요하다. 나고야와 아이치현은 일본 제조업의 중심지다. 정밀한 무대 장치와 기술적 연출은 일본의 산업 경쟁력을 문화적 능력으로 바꾸었다. 가부키와 나고야성은 전통을, 첨단 무대기술은 미래를 상징했다. 일본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소유한 국가, 오래됐지만 낡지 않은 국가로 자신을 연출했다.

이는 경제 침체와 고령화, 중국의 부상과 한국 문화산업의 성장 속에서 이전과 같은 존재감을 보여주기 어려워진 일본의 처지와도 연결된다. ‘경제대국’이라는 오래된 자기소개만으로는 아시아의 중심을 자처하기 어려워졌다.

‘일본이 없는 아시아’

일본은 그 빈자리를 전통과 기술, 질서와 신뢰라는 국가상으로 채웠다. 개막식은 일본이 여전히 아시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대였다.

그러나 개막식의 절제된 연출을 일본 고유의 미학으로만 평가하기 어렵다. 대회 준비 과정에서는 비용과 시설, 숙박과 수송 문제가 이어졌다. 별도의 선수촌 대신 호텔과 선박, 조립식 숙소가 활용됐다. 일부 선수단은 이동과 등록 과정에서 불편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막식의 절제는 비용 압박과 준비 부족을 일본적 단정함으로 바꾸는 장치가 됐다. 현실에서 흔들린 일본의 조직력이 무대 위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다.

개막식은 아시아의 축제처럼 보였지만 일본이 일본을 설명하고 칭찬하는 자기소개서에 가까웠다. 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동등하게 펼쳐 보이기보다 일본의 전통과 기술을 중심에 놓았다.

아시아를 일본과 함께 의미를 만드는 주체라기보다 일본의 성취를 바라보고 승인하는 관객으로 배치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아시아를 초대하고 배열하며 미래를 제시하는 연출자의 자리에 섰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의 아시아’라는 구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 성찰이 빠진 개막식 무대

일본이 그린 조화로운 아시아에는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 전후 책임과 역사 갈등이 없었다. 일본의 오래된 전통은 세심하게 복원됐지만 일본 제국의 기억은 삭제됐다. 자랑할 수 있는 과거는 문화유산이 되고 책임져야 할 과거는 행사와 무관한 정치 문제로 밀려났다.

모든 역사를 개막식에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개최국이 굳이 아시아의 화합을 말한다면 아시아를 갈라놓은 역사에도 책임 있게 접근해야 한다. 갈등의 원인과 책임을 지운 채 하나가 되자고 요구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잊고 미래로 가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일본의 화합은 자기 성찰의 언어라기보다 아시아의 기억을 관리하는 언어처럼 보인다.

나루히토 천황이 개막을 선언한 장면은 이러한 모순을 압축한다. 현재 일본에서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지만, 아시아의 역사에서 천황제를 일본 제국주의와 분리해 기억하기 어렵다. 그런 천황이 아시아의 화합을 내세운 대회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러나 중계는 이를 자연스러운 국가 의전으로 처리했다. 제국의 역사는 사라지고 평화와 통합의 상징만 남았다.

아시안게임 개막행사에 참석한 일본 나루히토 천황(왼쪽부터), 마사코 황후, 아키시노 황태자 부부
아시안게임 개막행사에 참석한 일본 나루히토 천황(왼쪽부터), 마사코 황후, 아키시노 황태자 부부

일본이 편집한 일본을 보는 시청자

무대 밖에서는 ‘하나의 아시아’라는 구호의 허약함이 드러났다. 한국 선수단은 입국 과정에서 대형 태극기를 들고 이동하지 못했다. 대만 대표단의 공식 행사 참여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무대에서는 국경을 넘어 하나가 되자고 했지만 밖에서는 어떤 국기를 허용하고 누구를 국가의 대표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충돌했다. 하나의 아시아는 조명이 켜진 무대에서만 존재했다.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다. 아시안게임은 처음부터 국가를 기본 단위로 구성된다. 선수들은 국기 아래 입장하고 국가를 들으며 국가별 메달 순위에 편입된다. 천황이 개막을 선언하고 지방정부는 도시를 홍보하며 기업은 국가주의적 열기를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정치와 자본이 행사를 조직하면서 선수와 관중에게만 정치를 말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방송은 이러한 국가 연출을 비판하기보다 확대한다. 카메라는 천황과 귀빈석, 국기와 불꽃, 나고야성과 가부키를 차례로 비춘다. 해설은 전통과 첨단기술의 조화를 칭찬하지만 어떤 역사적 맥락이 삭제됐는지는 묻지 않는다. 시청자는 일본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편집한 일본을 본다.

경기가 시작되면 화합의 구호는 국가 간 서열 경쟁으로 바뀐다. 선수 개인의 노동은 ‘일본의 승리’, ‘한국의 패배’, ‘중국의 독주’라는 문장으로 압축된다. 국가별 메달 순위는 경제력과 인구, 체육 예산과 훈련 환경이 다른 현실을 지운 채 국력의 서열표처럼 제시된다. 개막식은 하나의 아시아를 말하고, 중계는 분할된 아시아를 판매한다.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전은 이 구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송은 경기를 역사적 설욕과 국민적 자존심의 문제로 확대한다. 일본을 이기면 과거사를 되갚은 것이 되고 지면 국가적 수치가 된다. 식민 지배의 역사는 성찰과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경기의 긴장감을 높이는 흥행 재료로 소비된다. 역사를 가장 자주 불러내면서, 가장 가볍게 다루는 장르가 국제스포츠 중계다.

개막식에서 숨긴 것들, 찾아야할 것들

따라서 이번 아시안게임 방송은 승패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일본이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만큼 무엇을 지웠는지 살펴야 한다. 왜 나고야성과 가부키를 앞세웠는지, 왜 제조업과 기술의 이미지를 강조했는지, 왜 천황이 아시아의 축제를 여는 장면은 정치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의 아시아’라는 구호 안에서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나는지도 보아야 한다.

선수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도 살필 필요가 있다. 부상을 참고 출전한 선수는 투혼의 상징이 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한 선수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된다. 방송은 왜 선수가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뛰어야 했는지 묻지 않는다. 제도의 실패를 개인의 눈물로 덮고, 그 눈물을 다시 국민적 감동으로 판매한다.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것과 국가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문제는 응원이 아니라 응원을 이용해 역사를 단순화하고 선수의 희생을 미화하며 다른 국가를 적으로 만드는 방송의 방식이다.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감동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누가 그 감동을 설계했고, 무엇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아이치·나고야 개막식에서 일본이 아시아에 제시한 것은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일본의 전통을 감상하고 일본의 기술을 인정하며 일본이 제안하는 질서 안에서 화합하는 아시아였다.

화합은 명분이었고 중심에 놓인 것은 일본의 국가 브랜드였다. 우리가 화면에서 읽어야 할 것은 화려한 공연만이 아니다. 그 화려함이 덮어버린 역사와 실패, 그리고 일본이 다시 차지하려는 아시아의 중심 자리다.

글쓴이

박미숙 대중문화 독립연구가

박미숙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중문화를 연구했다. 영국에서 한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아시아학이며 세부 전공은 한국학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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