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하나 덜 위험한’ 맘다니의 여덟 그림자

좌파의 눈으로 본 맘다니의 한계 ‘좌파의 어렵고 비현실적 인식’ 해소 but 기득권에 대한 책임은 얼버무려 리더보다는 시민권력의 도시되어야 위기 속 뉴욕 ‘누구부터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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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의 취임사는 뉴욕의 위기를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정치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로 재정의하며, 좌파 정치의 언어를 공적 중심으로 복귀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취다. (관련기사: 뉴욕시장 취임 맘다니 “대담하게 시정”…첫 조치는 세입자 보호)

그러나 좌파적 기준에서 엄밀히 평가하면, 이 연설은 상징과 의지의 수준을 넘어 실제 권력 재편으로 나아가기에는 아직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적대의 명명은 조심스럽고, 갈등의 비용은 흐릿하며, 집합적 주체의 조직화와 민주적 통치 장치의 설계는 선언에 머문다. 대담하지만 아직 ‘위험해지지 않은’ 연설이라는 점이 이 취임사의 가장 큰 한계다.

“불평등이 정상은 아니다” 선언

취임사의 출발점은 명확하다. 주거비 폭등, 공공서비스의 후퇴, 불안정 노동을 개인의 실패나 능력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오랜 정치·경제적 선택이 누적된 결과로 되돌려 놓는다. 이는 성장과 효율을 자연화해 온 ‘자유주의 도시 담론’을 거부하고, 도시를 다시 ‘정치적 책임의 공간’으로 호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맘다니는 ‘위기’를 관리해야 할 불편이 아니라, ‘전환의 계기’로 제시한다. ‘정상 상태’로 위장된 불평등을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뉴욕 정치의 주류가 회피해 온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이 연설의 가장 큰 강점은 급진적 문제의식을 생활세계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이다. 이념적 구호 대신 집, 교통, 의료, 돌봄 같은 일상의 감각에서 불평등을 설명함으로써 좌파 정치가 종종 함정에 빠지는 추상성과 도덕적 고양을 피해 간다. 시민은 통계나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구조를 인식한다. 분노를 호출하되 혐오로 조직하지 않고, 연대를 설득의 핵심 감정으로 삼는 선택 역시 다인종·다계급 도시의 현실에 부합한다. 좌파는 어렵고 비현실적이라는 오래된 비난을 이 연설은 상당 부분 무력화한다.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의 취임식 현장 동영상

급진성이 없는 좌파가 좌파인가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면, 이 취임사는 급진성의 문턱에서 멈춘다. 첫째, 적대의 정치가 끝까지 명확해지지 않는다. 불평등의 구조는 제시되지만, 그 구조에서 지속적으로 이익을 취해 온 주체들- 금융화된 부동산 자본, 대형 개발사, 민영화된 도시 서비스 기업, 기업 로비와 결합한 정치 권력-은 조심스럽게 비켜간다. 구조를 말하되 책임 주체를 흐리면 비판은 관리 가능한 개혁 수사로 흡수된다. 좌파 정치의 힘은 위기를 설명하는 데서가 아니라, 누가 이 체제를 유지해 왔는지 이름 붙이는 데서 발생한다. 적대가 흐릿할수록 연대는 윤리적 호소로 약화되고, 정책은 타협의 대상이 된다.

둘째, 정책 비전은 있으나 권력 재배치의 경로가 희미하다. 공공주택 확대, 임대료 규제, 공공서비스 강화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해관계를 제한하고, 어떤 정치적 충돌을 전제로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급진성은 목표의 크기가 아니라,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갈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설득하는 태도에서 생긴다. “모두에게 이로운 변화”라는 언어는 금융과 부동산이 장악한 도시 권력 앞에서 쉽게 무력해질 수 있다. 재분배의 비용과 이익, 패자와 승자를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정책은 도덕적 권고에 머문다.

뉴욕이 ‘선한 리더’의 도시는 아니다

셋째, 시민의 호명은 반복되지만 집합적 정치 주체의 조직화가 구체화되지 않는다. 연설은 시민을 부른다. 그러나 노동조합, 세입자 조직, 이주노동자와 돌봄 노동의 집단적 힘이 어떻게 시정의 일상적 동력이 될 것인지, 어떤 제도적 통로를 통해 정책 결정에 개입할 것인지는 충분히 펼쳐지지 않는다. 좌파적 도시는 ‘선한 리더’의 의지에 기대는 도시가 아니라, 조직된 시민 권력이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도시다. 참여예산의 확대, 집단교섭의 제도화, 세입자 권리의 집합적 보장, 조직화에 대한 공적 지원 같은 장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될 때 연설은 실행력을 획득한다.

넷째, 국가·시장 너머의 도시 상상력이 제한적이다. 시장을 비판하지만, 시장을 대체·전환할 공적 생산과 협동의 모델은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다. 공공의 역할 확대는 중요하지만, 공공이 어떻게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감시될 것인지가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관료적 확장으로 오해 받기 쉽다. 좌파적 급진성은 공공의 확대와 동시에 민주적 통치의 강화를 요구한다. 공공기관의 민주적 거버넌스, 시민 감사와 참여, 노동자·이용자 공동결정 구조가 병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연설의 대담함이 아직 정치적으로 위험해지지 않는다. 위험하다는 것은 반대편의 조직된 저항을 촉발할 만큼 이해관계를 건드린다는 뜻이다. 취임사는 설득력 있지만, 아직 기존 권력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정도로 구체적이지는 않다. 좌파 정치가 상징을 넘어 구조를 흔들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갈등을 감수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합의의 언어만으로는 도시 권력의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여섯째, 재정과 법·제도의 전환 경로가 추상적이다. 야심찬 정책은 재원과 법적 권한의 재배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취임사는 증세·규제·공공투자의 우선순위를 어디서 어떻게 바꿀지, 주·연방 권력과의 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신중한 침묵을 유지한다. 좌파의 급진성은 재정의 정치에서 시험된다. 숫자와 권한의 문제를 회피할수록 연설은 상징으로 남는다.

일곱째, 위기 대응의 시간표와 우선순위가 모호하다. 주거와 돌봄, 교통과 보건은 모두 긴급하지만 동시에 다룰 수는 없다. 무엇을 먼저, 어떤 순서로, 어떤 집단을 우선 보호할지의 선택은 정치적 결단이다. 취임사는 방향을 제시하지만 선택의 비용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는다. 급진성은 ‘모두를 위한 약속’이 아니라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에서 나온다.

여덟째, 연대의 범위는 넓지만 결집의 강도는 약하다. 포괄적 언어는 배제를 줄이지만, 때로는 동원의 날을 무디게 만든다. 좌파 정치가 실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괄성과 함께 집중된 결집의 전략이 필요하다. 특정 전선에서의 선명한 승부가 전체 연대의 신뢰를 만든다.

종합하면, 맘다니의 취임사는 도시 불평등을 다시 정치의 언어로 돌려놓았고, 좌파가 대중과 만나는 방식에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좌파적 급진성은 선언의 톤이나 선의의 약속이 아니라, 적대를 명확히 하고, 갈등의 비용을 공개하며, 권력 재배치의 경로와 시간표를 제시하고, 집합적 주체를 조직하며, 민주적 통치 장치를 설계하는 데서 완성된다. 그 지점까지 나아갈 때에만 이 담대한 취임사는 상징을 넘어 도시 권력의 실제 재편을 여는 정치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글쓴이

박미숙 대중문화 독립연구가

박미숙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중문화를 연구했다. 영국에서 한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아시아학이며 세부 전공은 한국학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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